“가짜 ‘돈’을 우리는 왜 믿는가”…‘트러스트’로 퓰리처상 수상한 미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9일 11시 43분



아르헨티나 출신 미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돈’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독자들이 호응했다”고 했다. ©Pascal Perich
미국의 투자가 앤드루 베벨은 20세기 초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를 호령했다. 앤드루는 1929년 경제 대공황 시절, 주가가 떨어졌을 때 수익을 내는 공매도(주식을 빌린 뒤 매도하고 미래의 가격에 주식을 되사서 갚는 매매 기법으로 향후 주가 하락에 베팅해 수익을 내는 방법)에 투자해 큰 이득을 얻었다. 대공황 직후엔 망한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고 경제가 회복된 뒤 비싼 값에 팔았다. 공격적인 주식 투자로 떼돈을 번 수완가인 셈이다.

반면 앤드루는 시장 붕괴를 주도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공매도를 정확한 시점에 성공한 데엔 ‘주가 조작’ 세력과의 결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앤드루는 또 1933년 뉴딜 정책 때 공매도를 시도했다가 대중으로부터 비난도 받는다. 나라가 망하는데 투자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앤드루를 ‘투자의 귀재’와 ‘투기꾼’ 중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그 둘을 구분하는 게 가능은 할까.

장편소설 ‘트러스트’ 표지. 문학동네 제공
장편소설 ‘트러스트’ 표지. 문학동네 제공
아르헨티나 출신 미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50)는 올 2월 국내 출간된 장편소설 ‘트러스트’(문학동네)에서 이처럼 돈에 대한 민감한 문제를 다룬다. ‘트러스트’는 지난해 미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올해의 책에 선정됐고, 에르난은 이달 8일(현지시간) 미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으로 금융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 퓰리처상 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나오며 화제를 끌고 있다.

에르난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난 경제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 SVB 파산이 수상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며 “다만 ‘트러스트’를 읽으며 금융권의 신뢰에 대해 생각하게 된 사람이 많다. 소설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금융 시스템을 완벽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간극에 대해 알고 싶었죠.”

에르난이 소설 제목을 ‘트러스트’로 정한 건 돈이 곧 신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르난은 “모든 금융 시스템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돈은 사람들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짜”라고 했다. 에르난은 또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많은 금융 위기를 생각해 보라”며 “신뢰가 무너진 뒤 우리는 얼마나 비참해졌나. 우리의 삶이 가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고 되물었다.

에르난은 소설에서 ‘투자 귀재’ 앤드루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룬다. 예를 들어 1부는 한 소설가의 시선에서 진행되는데, 소설가는 앤드루의 공매도를 ‘장난질’로 규정한다. 반면 앤드루가 쓴 자서전 버전인 2부에선 앤드루가 자신은 투자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변호한다. 독특한 건 앤드루의 비서가 집필한 버전 3부와 앤드루 아내가 쓴 버전인 4부에서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소설의 끝에 이르렀을 때 우린 앤드루를 단순히 지지 혹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에르난은 “세상의 진실은 복잡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만을 신뢰한다. 선입견이 무너진 뒤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다”며 “내가 사랑하는 일본 영화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의 영화 ‘라쇼몽’(1950년)처럼 관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에르난은 일약 영미 문학의 ‘스타’가 됐다. 소감을 묻자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전 그동안 고독하게 혼자 일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작품을 쓰겠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