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문화재청은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 유적 하부를 조사한 결과, 고종(재위 1863∼1907)시기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를 일부 확인했다고 밝혔다.
유구는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다.
문화재청은 “고종년간에 월대가 축조되기 이전에도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됐다는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해 오다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물적 증거까지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부연했다.
이번 조사는 문화재청이 지난달 언론공개회를 통해 광화문 월대 규모와 기초시설, 전체 모습 등 그간 조사가 완료된 성과를 한 차례 공개한 이후 추가로 실시한 것이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화문 앞 공간의 퇴적양상과 활용양상이 확인됐다.
광화문 밖 공간의 퇴적층은 자연층에서 14~16세기 조선 전기 문화층, 17세기 이후 조선 중·후기 문화층, 19세기 월대 조성층을 거쳐 20세기 근현대도로층의 순으로 형성됐다.
조선 전기 문화층은 2007년 광화문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번에 발굴된 유구는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御道·임금이 지나가는 길)지 서쪽 기초시설 하부 약 120㎝ 지점에 있는 조선 전기 문화층의 최상단에서 확인됐다.
사각형 석재 1매(76×56×25㎝)를 중심으로 양쪽에 남북방향의 석렬(石列·돌로 열을 지어 만든 시설)이 각각 한 줄씩 배열된 양상으로, 방형 석재 중앙에 직경 6㎝의 철제 고정쇠가 박혀 있었다.
이는 궁중 행사에서 햇빛 가리개로 사용되는 차일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와 유사하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석렬유구가 동쪽 어도지 하층 탐색구덩이 조사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으로 미뤄 보아, 고종년간 월대 어도지 하층에 전체적으로 유사한 양상의 조선 전기 유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선 중기~후기 유구는 조선 전기 문화층을 일부 파괴하고 조성된 층에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민가의 흔적 등도 확인돼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됐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며 “이후 고종대에 이 층을 정리하고 다시 흙을 쌓아서 월대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경복궁 영건일기’에도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정비와 관련해 ‘광화문 앞의 민가 중 어로(御路)에 불필요한 것은 모두 철거했다(1865년 윤5월 18일)’는 기록이 있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앞 공간에서는 고종년간 월대와 같은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깔아 축조하는 방식의 시설들을 갖추고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 기능이 상실되며 방치된 채 관리되지 못하다가 고종년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월대가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자료를 정밀 분석해 경복궁 광화문과 월대 공간과의 연관성, 활용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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