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이대 교수 ‘장인과…’ 펴내
조선 기술자들, 나무껍질 가공때
中-日처럼 갈지 않고 빻아 제작
뛰어난 방수력… 明 황제도 반해
“닥종이는 ‘조선의 반도체’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출품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 어떤 나라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자 기술력을 가진 산업이었어요.”
한반도 닥종이의 발전사를 조명한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푸른역사)를 최근 출간한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51·사진)가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달 30일 인터뷰에서 “조선 백자처럼 아름답지도, 조선 후기 과학서만큼 사료가 방대하지도 않지만 닥종이야말로 조선의 과학기술사를 대표하는 발명품”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가장 혁신적 기술이 과학자 장영실(1390∼?)이나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이 아닌 이름 모를 지장(紙匠)들에 의해 발명됐다는 얘기다.
닥종이는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최고의 상품이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를 촌장이나 부족장급인 5두품으로 인정했다. 신라산 닥종이는 당나라와 일본에 수출되며 인기를 끌었다. 송나라 재상 손목이 남긴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좋아 ‘백추지(白硾紙·다듬이로 반드럽게 만든 흰 종이)’라 불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교수는 여기서 ‘찧다’는 뜻의 한자 ‘추(硾)’에 주목했다. 그는 “이 한자는 우리 옥편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중국에선 쓰지 않는다. 고려의 지장들이 중국에 닥종이를 수출하면서 ‘石(석)’자와 늘어뜨린다는 뜻의 ‘垂(수)’자를 합성해 새 글자를 지은 것”이라고 했다.
나무껍질에서 얻은 섬유를 맷돌로 완전히 갈았던 중국과 일본의 지장과 달리, 한반도의 지장은 돌 위에 놓고 다듬이질하듯 빻았다. 이 교수는 “강한 섬유를 살려냈던 당대 지장들의 기지가 더 질기고 강한 종이를 발명해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든 닥종이를 다시 다듬이질하는 도침(搗砧) 공정은 조선시대 지장들이 완성시킨 기술이다. 1425년 명나라 황제가 이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세종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 교수는 “도침 공정을 거친 닥종이는 밀도가 높아져 현대의 플라스틱과 유사한 성분 구조를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닥종이는 방수 기능까지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닥종이의 독특한 특성이 조선에 ‘휴지(休紙) 문화’를 만들어냈다”고도 했다. 15세기 중반 닥종이 수요가 폭발하면서 지장들은 사용된 종이를 물에 풀어 다시 새 종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승정원일기’ 등에는 실록 편찬 뒤 남은 초고를 ‘271권 4장 반’ 등 반 장까지 낱낱이 집계해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재활용하기 위해 종이를 보관하는 ‘휴지 행정’이 자리잡은 것이다. 지장들은 휴지로 옷과 가방, 물통을 만들기도 했다. 계암일록(溪巖日錄)에 따르면 17세기 유지의(襦紙衣·종이로 만든 겨울옷)는 비단저고리보다 비쌌다. 이 교수는 “닥종이를 변신시킨 지장들의 발명은 종이의 발명만큼이나 위대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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