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정말 삼국을 통일했을까… ‘일통삼한’ 시점 논쟁 재점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6일 03시 00분


사학자 12명 함께 낸 신간서… 윤경진 교수 ‘7세기 성립설’ 반박
“통일전쟁때 ‘일통삼한’ 용어 없고, 7세기 성립설 근거로 제시됐던
‘운천동 사적비’ 9, 10세기에 세워… 신라말 통일관념 생겨 고려때 완성”

7세기 중엽 나당 연합군이 백제, 고구려와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 명장 김유신의 표준영정(왼쪽 사진). 김유신은 835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삼국통일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때는 822년 신라에서 ‘김헌창의 난’이 벌어져 내부 분열이 
일어난 뒤였다. 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7세기 중엽 나당 연합군이 백제, 고구려와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 명장 김유신의 표준영정(왼쪽 사진). 김유신은 835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삼국통일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때는 822년 신라에서 ‘김헌창의 난’이 벌어져 내부 분열이 일어난 뒤였다. 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7세기 중엽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건 상식으로 통한다. 물론 고구려의 영역을 모두 통합하지 못했고,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부정적 평가는 있지만 통일 자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한 논쟁이 오래 이어져 왔다. 1980년대 들어 신라가 당나라군과 연합한 건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을 뿐 애초에 고구려는 신라의 정벌 및 통합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달 31일 출간된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는가’(역사비평사·사진)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해 관련 학계 논쟁을 정리했다. 각각의 주장을 펼치는 사학자 12명의 논문을 엮은 이 책에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58)의 주장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당대 삼국통일을 뜻하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은 존재했을까. 기존에는 이 의식이 7세기 전후 신라에서 성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윤 교수는 “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 성립돼 고려의 태조 왕건이 완성시켰다”고 주장했다.

‘合三韓(합삼한·삼한을 합쳤다)’이 나오는 ‘청주 운천동 신라 사적비’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는 9, 10세기경 만들어졌다고 본다. 사진 출처 국립청주박물관
‘合三韓(합삼한·삼한을 합쳤다)’이 나오는 ‘청주 운천동 신라 사적비’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는 9, 10세기경 만들어졌다고 본다. 사진 출처 국립청주박물관
5일 전화로 만난 윤 교수는 “신라가 이른바 ‘삼국통일전쟁’을 벌였던 7세기 이전 사료에는 일통삼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일통삼한 의식 7세기 성립설’의 중요 근거 중 하나가 충북 ‘청주 운천동 사적비’다. 1982년 공동우물터에서 발굴된 이 사적비에는 ‘合三韓(합삼한·삼한을 합쳤다)’이라는 문구와 686년을 뜻하는 당나라 연호 ‘수공 2년(壽拱二年)’이 새겨져 있다. 윤 교수는 이에 대해 “수공 2년이 등장하는 문장에는 ‘초가도 손질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올 뿐 사적비가 이때 건립됐다고 볼 만한 단서는 없다”며 “686년은 비문이 아니라 사찰 건립 연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또 이 비문에 고려 초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사해(四海)’라는 말이 나오고, 나말여초 비문에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아간(阿干)이란 직위의 명단이 있는 점 등을 바탕으로 윤 교수는 사적비 건립 시기를 9, 10세기경이라고 주장했다.

보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는 871년 신라 경문왕 때 이 목탑을 다시 만들면서 제작한 금동 사리함이다. 표면에 ‘果合三韓(과합삼한·과연 삼한을 합쳤다)’는 문구가 나온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는 871년 신라 경문왕 때 이 목탑을 다시 만들면서 제작한 금동 사리함이다. 표면에 ‘果合三韓(과합삼한·과연 삼한을 합쳤다)’는 문구가 나온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일통삼한 의식의 형성은 신라 내부 상황과 관련됐다고 윤 교수는 보고 있다. ‘신라 성주사비(聖住寺碑)’는 건립 시기가 문성왕 재위(839∼857) 때로 명확하고 ‘삼한(三韓)’이 언급된 사료 중 빠르다. 당시는 822년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웅천주 도독(都督) 김헌창(?∼822)이 반란을 일으킨 뒤다. 윤 교수는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천주에서 벌어진 반란은 백제의 복구를 뜻하는 위협으로, 신라가 내부 분열을 막을 이념적 근거로 삼국통일 관념을 만들어냈다”며 “실제 정치이념으로서 삼국통일을 완성한 건 태조 왕건의 고려”라고 했다.

기존 설에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에 주겠다고 한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를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윤 교수는 평양 이남을 ‘고구려 영토’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통상적인 해석에 따라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이고 백제 영토를 주겠다고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는 견해다. 적어도 전쟁 이전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까지 모두 획득해 삼국을 통일하고자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게 ‘신라는 정말…’을 쓴 학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통삼한 의식의 성립 시기는 전쟁 이후인 7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이번 책을 엮은 정요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머릿말에서 “‘삼국통일’과 일통삼한 의식에 관한 주제는 한국 고대사 분야의 핵심적인 논쟁 주제”라며 “실증 논거를 바탕으로 한 논쟁이 더욱 발전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일통삼한#7세기 성립설#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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