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 스탠드를 채운 7만여 명 속에 앉아, 영혼의 대회를 참관했다.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였다. 6·25전쟁 때 한국을 방문해 쓴 일기를 출간해 수익금을 한국에 보낸 빌리 그레이엄(그래함) 목사(1918∼2018)는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50년 전, 이제는 전설 같은 그런 일이 있었다. 닷새 동안 330여만 명이 여의도광장으로 모여들어 여의도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대형 스크린으로 1973년 6월 3일의 여의도와 2023년 6월 3일의 월드컵경기장 영상이 함께 흘러갔다. 그런데 두 개의 풍경은 서로 섞이지 못한다. 50년 전 여의도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너나없이 간절한데, 월드컵경기장의 모습들은 세련된 데다가 여유 있어 보인다. 여의도의 그들은 바닥에 앉아 있고 월드컵경기장의 우리는 의자에 앉아 있다. 서로 다른 인종처럼 데면데면하게 화면이 흘러간다. 나는 여의도의 그 장면 속에서 혹여나 하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지상을 떠나간 내 어머니.
그날 남쪽으로부터 여섯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 여의도로 가기 전 그이는 내게 공중전화로 연락했다. “함께 가면 좋겠구나. 어미 소원이다.” 그 떨리는 목소리를 향해 나는 차갑게 말했다. “엄마,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사람 많은 덴 뭐 하러….” 찰칵 끊기던 수화기 너머의 여운이 아직도 가슴 언저리를 저릿하게 맴돈다.
어머니는 그 먼 길을 왜 그토록 허위허위 왔을까. 도대체 무엇이 각처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였던 걸까. 결여, 그리고 온갖 아픔, 상실,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슬픔 많고 배고프던 그 시절 여의도 앞으로 흘러가던 한강(漢江)은 한강(恨江)이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의 메시지가 이어졌고, 나는 시간 여행을 즐기다 일어설 참이었다. 그런데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공동대표회장)와 오정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대표대회장)의 통성기도가 시작됐다. “주여, 우리와 우리 후손을 위해 당신의 촛대를 옮기지 마소서.” 오 목사가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자”고 했다. 난감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자니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어머니가 무시로 하던 무릎 기도가 내겐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나는 고개 숙여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어머니가 그 먼 길을 왔던 건 천방지축 길들여지지 않던, 내면적 문제아인 내가 주원인이었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렇다. 나는 귀밑머리 희끗해지는 이 나이까지도 영적 지진아로 남아있다. 아직도 내 안에서는 온갖 죄성이 들끓고 열세 살 아이는 징징대며 더 달라고 보챈다. 나뿐이겠는가. 50년 전 여의도의 기도로 배고픔은 딛고 일어섰지만 한국 사회는 영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사회는 분열되고 증오는 일상이 됐다. 비로소 오늘 우리에게 50년 전의 여의도뿐 아니라 월드컵경기장이 왜 필요한지 선명해졌다.
오 목사의 기도는 계속됐다. “이 민족에게서 촛대를 옮기지 마소서. 하나 되게 하소서.” 구경꾼으로 물러나 있던 나도 비로소 입술을 달싹여 그 기도를 따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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