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 홍콩展
‘너의 잿빛 머리칼, 슐라미트’ 첫 공개
‘금빛-잿빛 묘사’ 독일서 논란 불러
“역사-철학-과학 동원해 복합적 표현”
오랜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랜 금빛의 들판 한가운데 검은 공터가 펼쳐져 있다. 이 공터의 안에는 불에 그슬린 지푸라기가 타다 남은 머리카락처럼 납작하게 붙어 있다.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란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마치 남은 금빛 들판도 조금씩 천천히 삼킬 듯이….
독일 출신의 현대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78)가 1981년 그린 작품 ‘너의 잿빛 머리칼, 슐라미트’(슐라미트)가 갤러리 거고지언 홍콩에서 처음 공개됐다. 거고지언 홍콩은 8월 5일까지 키퍼의 개인전 ‘hortus conclusus(닫힌 정원)’를 열고 있다. 키퍼가 홍콩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2012년 이후 11년 만이다.
● 독일의 어두운 역사 들춘 ‘슐라미트’
거고지언 홍콩에서 지난달 30일 만난 닉 시무노비치 거고지언 홍콩 시니어 디렉터는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을 프랑스 파리 근교 크루아시쉬르센에 있는 작업실에 직접 찾아가 키퍼와 함께 선정했다”고 말했다. 갤러리에는 키퍼의 대형 작품 8점이 걸려 있었다.
그중 ‘슐라미트’는 아시아 갤러리 전시에서 보기 힘들었던 1980년대 작품이다. 그는 “키퍼가 이번 전시를 위해 슐라미트를 출품하기로 하면서 이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슐라미트’는 키퍼가 루마니아 출신 시인 파울 첼란(1920∼1970)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영감을 얻었다.
유대인 출신의 첼란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죽음의 푸가’는 강제 수용소 내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표현한 작품으로, ‘전후 유럽 문학의 게르니카’로 불린다. 키퍼는 이 시를 인용해 독일의 어두운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점 제작해 왔다. ‘슐라미트’도 그중 하나다. 특히 ‘죽음의 푸가’에는 ‘너의 금빛 머리칼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칼 슐라미트’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금빛은 독일인, 잿빛은 유대인을 상징한다. 슐라미트는 유대인 여성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다. 금빛 지푸라기에 불꽃이 일고, 이미 불에 타 잿빛으로 변한 지푸라기를 교차한 키퍼의 작품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끄집어내 독일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슐라미트’도 그런 맥락에 놓인 작품이다.
● 역설적 아름다움 담은 예술 세계
키퍼의 예술은 어두운 역사를 고발하거나 단편적으로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숨은 이중성과 인간의 면모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역사, 예술, 철학, 과학 등 심층적 해석이 덧붙여지고 키퍼는 그것을 시각 언어로 종합한다. ‘슐라미트’에 금빛과 잿빛이 한데 뒤엉켜 묘사된 것처럼.
이번 전시에선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낫이 있는 밀밭’(2014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곰팡이를 주제로 한 ‘Ignis Sacer(성 안토니오의 불·2016년)’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독일 작가들과 함께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2007년에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조르주 브라크(1882∼1963)에 이어 생존 예술가로는 역사상 두 번째로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두칼레 궁전에 최초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는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키퍼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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