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슬픔에 잠겨도…그를 지켜준 사람들[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7일 11시 06분


빈센트 반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빈센트 반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작업은 잘 되고 있어. 그림 두 점을 완성했는데, 막 자른 풀밭을 그린 거야.”

1890년 5월 4일. 남부 프랑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언급한 그림 두 점 중 하나가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전에서 볼 수 있는 사진 속 작품입니다.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는 세상과 떨어져 병원에서 지내며 본 그곳의 정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흐는 두 달 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말년에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 중 대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특유의 스타일의 것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 ‘까마귀가 나는 밀밭’ 같은 대표작들이죠.

오늘은 고흐가 잔디밭을 그릴 무렵 겪었던 삶과 그런 그를 지지하고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사람의 흔적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일부, 1890. 캔버스에 유채. 64.5 x 80.7 cm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일부, 1890. 캔버스에 유채. 64.5 x 80.7 cm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흐가 ‘막 풀을 자른 모습’을 그렸다고 한 것처럼 이 그림에서는 잘려나가 뻣뻣하게 뻗어나간 풀들의 묘사가 화면 절반을 차지합니다.

강렬한 선과 검은색이 곳곳에 자리한 풀들의 모습에서 생명력도 느껴지지만, 불편하고 날선 감각도 전해집니다.

작품 제목을 보면 ‘나비’를 그린 것을 알 수 있지만, 잘린 풀들의 거친 선 사이에서 파묻힐 듯 그려진 나비들은 더욱 연약해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바닥을 바라보는 고흐의 슬픔이 가득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듯한 그의 외로움을 극대화하는 것은 저 멀리 보이는 길과 나무의 흔적입니다.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일부, 1890. 캔버스에 유채. 64.5 x 80.7 cm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일부, 1890. 캔버스에 유채. 64.5 x 80.7 cm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만약 펼쳐진 들판만 있었다면 생명력과 활기가 느껴졌을 텐데, 저 멀리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죠. 누군가가 다니는 길이 있다는 건 그곳에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저 멀리 그려진 길은 누군가와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남긴 채, 혼자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흐의 인생 스토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선입견이 작용했을 수 있지만, 이 작품을 보면 병원 정원에서 홀로 땅을 바라보는 고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반 고흐, ‘아를의 정신병원’, 1889년, 사진: 위키피디아
반 고흐, ‘아를의 정신병원’, 1889년, 사진: 위키피디아

고흐가 남부 프랑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은 1889년 5월부터 1890년 5월까지였습니다. 즉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병원에서 나오기 직전의 상황이었죠.

그는 1888년 잠시 작업실을 함께 썼던 폴 고갱과 관계가 악화된 후로 줄곧 정신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고갱이 그와 함께 머물고 있는 아를을 떠나려고 하자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사건이 유명하죠.

그 사건 후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고흐는 결국 마을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 등을 이유로 아를을 떠납니다. 그리고 새롭게 정착한 생 레미에서 다시 자발적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됩니다. 극심한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렸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를 지지하고 도와주었던 사람들
그러나 고흐는 병원에서도 풀을 깎은 정원을 그렸듯, 그림 그리기를 끊임없이 이어 갔습니다. 갇혀 있는 중에도 병원 내 외부의 여러 곳을 캔버스에 남겼고, 자신을 진찰한 의사의 초상도 그렸습니다.

나중에는 그릴 소재가 떨어지자 동생 테오에게 부탁해 이전에 그렸던 드로잉이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래 작품은 고흐가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린 것입니다.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사진: 위키피디아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사진: 위키피디아

그러나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 두 달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동생 테오가 달려왔지만 며칠 뒤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 슬픔은 영원히 계속될 거야”라고 하네요.

이렇게 비극적인 마지막, 예술가로서의 고통으로 고흐의 삶과 작품이 지금까지 잘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많은 작품들이 남아 사람들을 만나고, 그가 가졌던 생각들이 알려지게 된 데에는 동생 테오의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가 있었습니다.

우선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그가 가졌던 감정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고갱을 아를로 데려와 형과 함께 작업을 하도록 설득한 데에도 테오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료 예술가들이 인정과 격려를 해주었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고흐가 파리에서 만났던 툴루즈 로트렉과의 일화입니다.

툴루즈 로트렉,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1887년, 사진: 위키피디아
툴루즈 로트렉,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1887년, 사진: 위키피디아

1890년 1월 프랑스의 한 비평지에는 고흐를 ‘천재’라고 칭찬하는 글이 실립니다. 또 그다음 달에는 벨기에 브뤼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모임인 Les XX의 연례전에 초청을 받아 전시에도 참여하죠.

그런데 전시가 개막하는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벨기에 작가가 고흐의 작품을 모욕합니다. 이때 툴루즈 로트렉이 그에게 항의하며 그 말을 취소하지 않으면 결투 신청을 하겠다고 맞섰습니다. (이 시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렇게 종종 작품을 두고 결투를 신청했다는 일화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결투는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로트렉의 곁에 있던 화가 시냑도 만약 로트렉이 지면 그다음에는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라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예술가는 사과하고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아몬드 꽃’, 1890년, 사진: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 ‘아몬드 꽃’, 1890년, 사진: 위키피디아

위 작품은 고흐가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기의 방에 걸어줄 것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입니다.

그가 예술가로서, 혹은 타고난 성질로 겪은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그런 지지를 바탕으로 고흐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예술 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막 베어진 풀냄새가 날카롭지만 싱싱하게 다가오는 작품 앞에서, 그의 삶이 마주했던 복잡한 단면들을 그려보게 됩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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