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너의 왼손이…’ 정진새 연출가
지구 종말 이후 인간-로봇-동식물
종자저장고에 남기 위한 생존게임
두산아트센터서 내달 15일까지
무대 한가운데 작은 느티나무 분재가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실제 나무인 이 분재는 소품이 아니라 주인공이 될 것이다. 반은 로봇, 반은 인간인 주인공 릴리는 인간을 “섬기지도, 섬멸하지도” 않으며 극을 이끈다.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27일 초연되는 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에서 ‘비(非)인간’들은 병풍 같은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가 멸망한대도 저들만은 살아남아 다시 지구를 밝힐 것처럼 무대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너의 왼손이…’의 연출과 극작을 맡은 정진새 연출가(43·사진)를 14일 만났다. 그는 “팬데믹 이후 생태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간 연극이 인간성을 과도하게 찬미해왔다고 느꼈다”며 “다양한 생물종을 통해 인류세를 돌아보는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극은 생태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 쓴 노아의 방주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가 불타오르자 인간과 로봇, 동식물이 뒤섞여 탄 배 8척이 대피에 나선다. 하지만 배 한 척당 하나의 종(種)만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에 남을 수 있다. 장애인 과학자, 동물원의 비버 등은 후대의 생존을 위한 확률 게임을 한다. 정 연출가는 “이들은 비주류를 의미하는 왼손으로 악수를 하며 낯선 교감을 하게 된다”고 했다.
“연극은 세상의 거울이에요. 그러나 인간만 출연한 왜곡된 거울이었죠. 그 거울을 넓혀 자연 속 존재를 비추고 싶어요. 공상과학(SF) 연극은 SF 소설이나 영화에 비해 제약은 많지만 관객이 눈앞의 배우를 통해 인간 이외 존재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칫 근엄해질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서사는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쓴웃음으로 균형을 맞췄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두고는 “열매를 맺으려면 두 그루를 심어야지. 자기 손으로 (나무를) 키워본 적 없는 멍청한 인간”이라 비꼰다. 정 연출가는 “연극은 재미있어야 한다. 조심스럽다고 유머를 포기하기보단 잘 웃기려 고민한다”고 했다.
정 연출가는 지난해 국립극단과 선보인 SF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로 올해 1월 제59회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너의 왼손이…’는 물리학과 진화론, 생태학 등이 맞물려 세계관이 더 세밀해지고 방대해졌다. 그는 “마블 영화와 그래픽 노블, SF 문법을 잘 아는 양근애 평론가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했다.
“과학자와 달리 예술가는 감각적 논리만 있고 근거가 없죠. 사회를 설득하려면 작품에도 근거가 필요해요. 언젠간 영화 ‘어벤저스’처럼 제 작품 간 세계관도 연결해보고 싶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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