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우리말로 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견한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요. 이 귀한 자료를 한 장이라도 놓칠까 봐 수천 장에 이르는 신문 자료를 전부 복사해 연구실로 가져왔죠.”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65)는 19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문서보관소 아시아·아프리카별관에서 1908년 창간된 러시아 최초의 한글 신문 ‘해조신문’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가 찾은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에는 “연해주 동포들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고 쓴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기고문이 실려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탓에 그때까지 국내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가 당대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다는 증거였다. 박 교수는 해조신문 등 러시아 한인 신문 수천 장을 분석해 1995년 3월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탐구당)를 펴냈다. 학계에서 이 책은 러시아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조명한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는다.
정년 퇴임(8월)을 두 달 앞둔 박 교수가 최근 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자서전 ‘100년을 이어온 역사가의 길’(선인)을 펴냈다.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16일 만난 그는 “돌아보니 그동안 집필한 책 50여 권 중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가 가장 뜻깊다. 이 책을 쓸 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연구실에 침대를 들여놓고 온종일 자료에 파묻혀 살았다”며 웃었다.
“처음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1986년의 시대 정신은 민주화였어요. 사학자로서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습니다. 좌우 이념 대립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사의 저변과 외연을 넓히고 싶었어요.”
박 교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1860∼1920)의 생애를 복원하기도 했다.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선 말기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1990년대까지는 자세한 행적이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업으로 성공한 그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무장 투쟁을 벌이다가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돼 탈주 시도 중 총격으로 순국했다. 박 교수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이듬해인 1991년 1월 곧바로 러시아를 찾아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생존해 있던 최재형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1년간 수소문 끝에 러시아에서 최재형의 세 딸을 만났고, 최재형이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으며 한인 신문 대동공보를 재발행했다는 사실 등을 밝혀냈다. 최재형의 큰딸은 “어릴 적 안중근 의사가 집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는 생생한 기억도 전했다. 박 교수는 2012년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역사공간), 2018년 ‘페치카 최재형’(선인)을 펴냈다.
박 교수는 “40년 가까이 연구하며 확보한 독립운동사 관련 사료를 선보이는 박물관을 열어 후학과 시민들의 것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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