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탈북화가 심수진 전시회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이 열렸다. 지금까지 탈북민 사회에서 심수진이란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서 찾아가봤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뭔가 색다름이 확 와 닿았다. 작품들을 둘러보며 그 색다름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건 섬세함이었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종종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을 관람하면서 현대 미술에서 사라져가는 섬세함에 늘 아쉬웠고 목마름을 느꼈다.
작가 심수진의 작품들에는 칼끝의 섬세함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단풍나무잎 하나를 놓고 한 달 동안 칼질을 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들은 방식과 재료를 가리지 않았다. 유화도 있고 수채화, 아크릴화에 심지어 도자기도 있었다. 재료도 낙엽뿐만 아니라 모래, 보리대 등 다양했다. 하지만 작품들에 들어있는 공통된 특징은 섬세함이었다. 어떤 인내가 배어있어야 이런 작품 창작이 가능할까. 그는 왜 한국에 와서 작가의 길을 택했을까. 많은 궁금함을 안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자유의 땅을 밟기까지 그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중국에서 북송되는 과정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피투성이가 돼 정신을 잃었던 순간도 있었다. 자유의 땅이라 믿고 필사적으로 찾아왔지만, 그에겐 육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불과 3년 전까지 그녀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였다. 이 땅에 ‘작가 심수진’이란 이름으로 삶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절박함이 그녀의 작품에 녹아있었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을까.
● 서예 재능을 타고난 소녀
심수진은 1978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계공장 선반공이었고, 어머니는 상점 판매원이었다.
1995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삶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달랐던 점은 학교에서 글씨를 제일 잘 썼다는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사범대학 미술학부에서 서예를 전공한 학교 사로청지도원이었다. 학생들이 쓴 글 중에서 범상치 않은 글씨체를 발견한 여성 지도원은 14살 수진을 지도원방에 불렀다. 그러더니 붓으로 글씨를 써보게 했다.
“내가 볼 때 너는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 내가 서예를 가르쳐줄 건데, 배워볼 생각이 있어?”
수진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3살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계모 밑에서 사는 수진에게 서예는 너무나 호기심이 가득한 새로운 세계였다.
그때부터 사로청지도원은 수업이 끝나면 수진을 불러 서예를 가르쳤다. 농촌동원과 화목동원에서도 빼주고, 토끼가족이니, 폐동이니 등을 내야 하는 ‘꼬마과제’도 전부 면제해주었다.
대신 수진은 학교 벽보를 도맡아 만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재미있었다. 졸업반에 올라가선 교장에게 발탁돼 김일성 생일 등 명절 때마다 학교에서 중앙에 올려 보내는 ‘충성의 편지’나 학생기록자료 등을 써야 했다.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각종 필사와 붓글씨는 전부 그의 몫이었다.
1995년 졸업과 동시에 그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입대했다. 한시라도 빨리 계모의 손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속도전청년돌격대 9여단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대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원래 속도전청년돌격대는 건설을 도맡아하는 부대였는데, 당시엔 고난의 행군 시기라 자재가 없어 건설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농촌에 보낸 것이다.
고난의 행군으로 도처에서 아사자가 나오면서 사회의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졌다. 속도전청년돌격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년쯤 지나니 그와 함께 단천시에서 입대한 대원 20명 중 18명이 도망갔다. 각종 핑계를 내걸고 집에 갔다가 복귀하지 않은 것인데, 기차를 타고 며칠씩 걸려 집에 찾으러 가도 부모들이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인 때였다.
수진도 저녁에 열린 생활총화 시간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평양 친척집으로 도망갔다. 거기서 여비를 빌려 집으로 갔는데 계모는 당장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함북 청진에 사는 외삼촌 집에 가서 머물며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과를 파는 장사를 하다가 나중엔 동 장사를 시작했다. 동을 사서 혜산에 들여가면 산 가격의 두 배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다시 중국산 담배를 사서 나오면 또 두 배가 떨어졌다. 대신 동은 잘못 걸리면 사형까지 처하는 국가 전략 자산이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다닐 때 목숨을 걸어야 했다. 혜산역에 내리면 사람들이 검열을 피해 나가기 위해 3m나 되는 담장에 새까맣게 매달렸다.
● 18세에 인신매매범에게 걸려들다
그의 탈북은 우연히 이뤄졌다. 인신매매범의 마수에 걸린 것이다.
1996년 11월 그는 열흘 넘게 혜산역에서 노숙을 하는 신세가 됐다. 동을 팔고 담배를 사서 돌아가려는데, 전기가 없어 기차가 열흘째 오진 않았다. 할 수 없이 담배를 다시 팔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행색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그에게 다가왔다. 산에 벌목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을 석 달쯤 해주면 큰 돈을 만지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제안도 솔깃했지만, 돈도 떨어져가는 터라 당장 밥을 먹는 것이 급했다.
그녀를 따라 어떤 집에 가니 중국산 쌀이 무려 다섯 포대나 쌓여있었다. 당시에 그 정도 쌀을 갖고 있는 집은 드물었다. 저녁이 되니 인근 국경 경비대원들이 몰려와 밥을 먹고 갔다. 알고 보니 벌목이 아니라 밀수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갔고 이들을 봐주는 군인들도 밥을 먹고 갔다.
이 집에서 한달쯤 일했을 때, 그 아줌마가 또 제안했다. 강을 건너가 물건을 좀 받아갖고 오라는 것. 저녁마다 압록강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사람들을 봤던 터라 수진은 돈을 많이 준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녀와 함께 다른 여성 두 명도 함께 강을 넘었다.
강을 건너니 중국에서 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물건을 실으러 가야 된다며 이들을 싣고 몇 시간을 달려 어느 집에 내려놓았다. 집은 컸는데 담장 위엔 철조망을 쳐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집 주인이 나오더니 처음에는 물건이 오려면 기다려야 한다며 먹을 것도 풍족하게 주고 새 옷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지린(吉林) 성 퉁화(通化) 시에 소속된 메이화구(梅河口) 시였다. 연변과는 차로 열 시간 넘게 떨어진 곳이었고, 장백에서도 차로 남쪽으로 몇 시간 와야 하는 곳으로, 북한 자강도 만포시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며칠쯤 지나 북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철조망을 친 집을 벗어나 도망가도 주변이 온통 한족이라 나가자마자 잡힐 것이 뻔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주인은 저 남자를 따라가 밥을 해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집에 돈도 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집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를 데려오느라 돈을 많이 써서 보낼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수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생지옥처럼 변한 북한에 남은 미련도 없었다. 중국에 와서 지내보니 먹을 것도 풍족하고 살 만한 세상이었다. 남들은 돈을 써서 넘어오기도 힘든데,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중국에서 결혼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장춘의 첫 탈북 여성
1997년 1월에 남자를 따라가보니 장춘이었다. 그를 산 남자는 일본뇌염 후유증으로 짜증을 달고 사는 30세 조선족이었다. 그는 장가가기 위해 4000위안을 내고 수진을 샀다. 당시 4000위안이면 500달러 정도 됐다.
북한 아줌마가 그들을 얼마나 팔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처녀들은 단돈 100달러에 팔렸다.
1999년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영화 ‘쉬리’에서 북한군 특수 8군단 소좌 박무영(최민식 역)은 국정원 요원 중원(한석규 역)에게 침을 튀기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딸들이 국경 넘어 매춘부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개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죽은 지 새끼의 인육마저 뜯어먹는 그 에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기자는 탈북해 연변에 숨어있던 2000년에 그 영화를 봤다. 북한 여성들이 단돈 100달러에 팔려 다니는 현장에서 내가 느꼈던 울분과 분노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여성들 속에 심수진도 있었다.
수진은 한국에 온 뒤 자신을 팔았던 북한 아줌마가 한국에 와서 탈북민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녀를 보자 마음속 감정이 복잡해졌다.
거짓말하고 자신을 팔아먹은 것은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한편으로 저 여자 때문에 내가 목숨을 건져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 아줌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수진은 장춘에 팔려온 첫 북한 여성이었다. 1년쯤 지나니 여기저기서 북한 여성들이 하나둘 장춘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2007년 그가 살던 마을에는 탈북 여성이 20명이 넘게 시집와서 살았다.
하지만 수진이 한국에 먼저 온 뒤 친했던 사람에게 한국행 루트를 알려주자 몇 명씩 줄 지어 한국으로 왔다. 얼마쯤 지나니 그 마을의 탈북 여성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런 일은 중국 지린 성이나 흑룡강 성의 수많은 마을에서 벌어졌다. 중국 조선족들은 탈북 여성들을 “갈데없는 거지같은 신세를 걷어주고 먹여 살렸더니 애까지 낳고는 다 달아나는 배은망덕한 여자들”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탈북 여성들은 아무리 애를 낳고 살았다고 해도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처지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고, 원치 않은 남자에게 팔려와 온갖 학대를 감내하고 살아야 했다. 한국에 온다는 것은 그들에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조선족들이 입장을 바꾸어 그들의 처지라고 해도 도망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진은 수많은 탈북여성들의 삶을 대표하는 표본이기도 했다. 팔려와 1년쯤 살게 되니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나자 감시도 약해지고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그는 장춘 시내에서 호텔과 식당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월급날이면 시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업고 나타나 돈을 받아갔다. 씨받이 역할을 마쳤으니 그 다음은 아들을 인질로 잡힌 돈 버는 노예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
수많은 탈북민이 경험했던 북송의 위기가 수진에게 찾아왔다. 2001년 식당에서 일하던 때 갑자기 공안이 찾아와 그를 체포했다. 그는 장춘에서 체포된 탈북민 4명과 함께 북송 기차에 탔다. 기차를 타니 멀미가 심했다. 그는 수시로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하도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거리니 호송원들이 그녀의 수갑을 벗겨주었다. 중국 기차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설마 24세 여성이 도망을 칠까 방심한 것이었다.
수진은 죽더라도 북한에 다시 돌아가기 싫었다. 지금 탈출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인생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5시가 지나자 호송원들도 꾸벅꾸벅 잠을 자기 시작했다. 수진이 앉은 좌석의 창문 쪽 자리엔 평범한 조선족 남성 둘이 앉아있었다. 그는 남성들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북한으로 끌려가는 탈북 여성입니다. 제가 이제 가면 살아올 것 같지 못합니다. 제발 부탁인데, 창문만 좀 올려주십시오.”
하도 부탁하니 창문 옆에 앉은 남성들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슬그머니 창문을 올려주었다. 수진은 순식간에 창문을 넘어 기차 밖에 매달렸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까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어느 집 문 앞에 누워있었다.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옷도 다 찢어졌다. 자신이 어떻게 민가의 문 앞에 누워있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짐작으론 누군가 선로 옆에 쓰러진 여성을 보고 마을로 데려다놓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동네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다. 깜짝 놀란 여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여주인은 긁힌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옷도 새로 가져다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연길이라고 했다. 그는 장춘의 남편에게 전화했다. 수진은 남편이 전화 속에서 내뱉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혀간 줄 알았는데, 또 전화 온 걸 보니 갈 데가 없네….”
수진은 이제 돌아가면 무조건 집을 뜨리라고 결심했다. 장춘에서 시누이가 찾아왔다.
● 베이징의 북한 작품 가이드
장춘에 돌아와 얼마쯤 있으니 남편이 돈 벌어온다며 고기잡이 어선을 타러 갔다. 그는 시집에 “북한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산둥(山東) 성으로 갔다. 같은 마을에 살던 탈북 여성 한 명이 그쪽으로 가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산둥에 간 그는 한국 회사에서 식모 자리를 얻었다. 한국인 직원 50명과 일본인 10여명이 일하는 큰 회사였다. 거기서 2년 동안 일하다가 2004년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베이징에선 북한 예술작품을 파는 회사에 취직했다. 사장은 조선족이었는데 북한에서 그림과 수예, 보석화를 받아다가 한국인들에게 팔았다. 수진은 전시장을 찾아온 한국 관광객들에게 북한 작품을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인들은 그를 조선족 가이드로 알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에겐 너무 적성이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하루는 북한대사관에서 찾아와 그림 판매 실태를 파악하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북한 외교관들을 본 순간 수진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곧바로 사표를 낸 수진은 베이징에서 한국인 가정집들을 다니면서 밥과 청소를 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 세 가정을 찾아갔다. 한국 가정과의 만남은 그에게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주었다.
“한국 외교관 가정과 LG 현지 직원 가정 등을 다녔는데 모두가 신사다웠습니다. 물론 잘 사는 집도 있고 못 사는 집도 있었지만, 모두 매너가 좋았습니다.”
한국 외교관의 부인은 미인이었는데, 비밀 유지 차원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남편하고는 말하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했던 것이 기억이 남는다.
하지만 베이징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외지인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그는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2007년 초 한국행 루트를 찾은 뒤 길을 나섰다. 동남아를 통해 한국에 오는 과정은 다른 탈북민들과 똑같았다.
“태국 감옥에 들어가니 중국에서 결혼했던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한국에 가면 중국 남편과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말을 하더군요. 저는 한국 가정을 2년 가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작 가봐라. 가면 눈이 높아져 절대 중국 남자 데려오지 않는다. 데려오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중국 남편을 데려온 탈북 여성들은 많지 않지요.”
● 한국에서 시작한 작가의 삶
2007년 2월 수진은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기관에서 담당 조사관이 그가 쓴 한자 이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다른 중국어도 써보게 하더니 “탈북 이후에 중국어를 배운 사람은 절대 이렇게 쓸 수가 없다. 중국에서 태어나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고선 이렇게 예쁘게 한자를 쓰기 힘들다”고 했다. 덕분에 위장 탈북민으로 오해받아 조사를 좀 더 받기도 했다.
그해 8월 그는 평택에 임대주택을 받고 한국 사회에 정착했다. 3개월 뒤 전자부품 제작 회사에 검사원으로도 취직했고, 하나원과 연계된 대학인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에 디자인 전공으로 입학도 했다. 모든 게 잘 풀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2010년부터 각종 병마가 그를 괴롭혔다. 밥을 챙겨먹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위궤양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거기에 심각한 간경화까지 겹쳤다. 더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중증장애인 진단까지 받게 되니 우울증도 찾아왔다. 그는 점점 삶의 희망을 포기해갔다.
그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남은 인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경험한 충북 옥천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2010년 옥천으로 내려갔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현지 문화센터에 등록해 도자기 체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은 거기서도 빚을 발했다. 선생과 수강생 모두가 어디서 전문적으로 배웠냐고 물었다. 아무리 처음 해보는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도자기를 빚으면서 그는 난생 처음 편안함을 느꼈다. 온 정신을 집중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 재료비가 들지 않는 작품을 생각하다가 낙엽을 재료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단풍나무잎을 주어와 칼로 그림을 새기다보면 온갖 시름이 잊혀졌다. 작품 창작은 그에게 삶의 끈이 되었다. 6년을 그렇게 흘려 보냈다.
도자기와 판화로 입문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한 시도 떠나지 않았다. 2016년 몸이 어느 정도 좋아지자 서울디지털대 회화과에 입학해 2018년 차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모래를 재료로 하는 보석화에 빠졌다. 모래에 150가지 색을 입혀 작품을 창작했다. 2018년엔 보릿대를 주워와 작품을 만들었다.
2017년 수진은 제7회 대한민국서화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해 은상을 받았다. 이 일은 그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2018년 국제현대미술대전 은상, 대한민국창작미술대전 동상 등 출품작들마다 좋은 평가를 받게 되자 그는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서화협회에 정회원으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받은 상만 10여개가 넘는다.
작가 심수진을 키운 것은 타고난 재능과 끈질긴 몰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가 받쳐줄 때 가능한 일이었다.
●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건강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한나절 동안 작업을 하면 한나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일이 반복됐다.
2020년이 되니 병원에서도 간경화를 더는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시한부 판정이었다. 남은 것은 간 이식밖에 없었다.
간 기증자를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이때 아들이 엄마에게 간을 떼어주겠다고 나섰다. 물론 아들도 쉽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아들은 2015년 17세 때 한국에 왔다. 엄마와 살겠다고 중국을 떠나온 것이었다. 원치 않은 결혼과 출산을 거쳐 태어난 아들이고 오랫동안 엄마와 떨어져 자란 아들이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닌 아들은 국적을 결정할 순간이 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 국적을 얻으려면 군대에 갔다와야 했다.
수진이 “앞으로 엄마와 계속 같이 살려면 군에 갔다오는 길밖에 없다”고 하자 아들은 “엄마 고향 사람들에게 총 겨누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아들은 결국 한국 국적을 선택했고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근무한 뒤 만기 전역했다. 전역한 날 아들은 수진에게 “군 복무가 별거 아니었어요. 괜히 많이 고민했네. 갔다 오길 잘했어요”라고 했다.
군에 다녀온 뒤로 아들은 많이 달라졌다. 돈을 아껴 쓰려고 하고, 소소한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는다. 올해 2월엔 지방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취직을 준비 중이다.
아들이 군 복무를 하던 2020년 수진은 쓰러졌다. 몇 달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네가 엄마를 좀 살려줘야겠다. 나는 13살에 엄마를 잃고 살았는데, 지금 엄마가 되고 보니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형제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네가 엄마의 꿈을 이루게 좀 도와주렴.”
아무리 아들이지만 어릴 때 두고 온 터라 그럴 말을 할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엄마는 왜 나를 계속 힘들게 하냐”고 푸념도 했지만 결국 어머니를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떼어낸 아들의 간 60%가 수진에게 이식됐다. 이제 수진은 아들의 간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야 한다. 간 이식 후 건강은 뚜렷하게 좋아졌다. 피부도 좋아지고 식성도 달라지고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았다. 피곤한 것도 많이 사라졌다. 이젠 살만해졌다.
아들을 볼 때마다 수진은 “내가 살려고 너를 낳았구나”라는 생각이 늘 든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새로 얻은 목숨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값있게 쓰고 싶다. 화가 심수진의 한계가 어디인지 끝까지 가보고 싶기도 하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여전히 값싼 재료를 구해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건 지금 느끼는 행복에 비해선 큰 고민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북에서 19년, 중국에서 10년, 한국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건강이 나쁜 사람이 북한이나 중국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겠습니까. 한국의 복지제도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저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사는 매일 매일이 저에게 찾아온 선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젠 꿈도 펼칠 수 있게 됐습니다.”
2023년 6월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는 탈북작가 심수진을 알리는 첫 개인전이기도 했다. 그는 이달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열리는 신라호텔 ‘2023 그랜드 아트페어’ 초대전에도 참가한다.
“지금까지 저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와 빛을 보려 합니다. 새 생명도 얻고 내 꿈도 펼칠 수 있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서 꼭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그의 첫 전시회 타이틀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의 여행은 이제 시작됐다. 전시회는 작가 심수진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 여행길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나는 전시회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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