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더는 누릴 수 없었던, 출산 후 여성 예술가들의 분투기
아이와의 경험 작품에 녹인 시인… 공동 양육 강조한 SF작가 르 귄 등
이 시대 워킹맘의 삶과도 닿아있어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줄리 필립스 지음·박재연 외 옮김/536쪽·3만3000원·돌고래
1928년 미국 뉴욕의 한 산부인과, 첫아이를 2년 전 잃고 두 번째 아이를 낳은 28세 여성 화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우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화가는 우는 아이를 능숙하게 달래는 간호사 앞에 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수시로 잠에서 깨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하루가 반복됐다. 역시 화가인 남편은 아이를 돌보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나도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파괴되어 갔다.”
화가는 미국의 인물화 거장으로 꼽히는 앨리스 닐(1900∼1984)이다. 1974년 그의 나이 74세 때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선 회고전이 열렸다. 평론가들은 그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에 대해 “어머니이자 연인, 화가로서 자신에 대해 남긴 최후의 증언”이라 평했다. 수십 년 전 예술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닐이 끝내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기에 이뤄낸 일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느라 아이를 비상계단에 두고 왔다는 소문과 ‘이기적인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시선에 굴하지 않고 ‘아줌마 예술가’로 살기를 택했다. 만년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림을 포기한다면, 영원히 그림을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그려야 합니다.”
책은 예술과 양육이 양립할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 세계적인 여성 문인들의 전기를 써 온 저자가 20세기 초 태어나 엄마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산 이들을 통해 양육자와 예술가 사이의 갈등과 방황을 고찰했다. 앨리스 닐뿐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1919∼2013)과 비평가 수전 손태그(1933∼2004) 등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담겼다.
저자는 무엇보다 공동 양육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세계적인 공상과학 소설가 어설라 르 귄(1929∼2018)이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그의 글쓰기를 지지하며 함께 아이를 돌본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 귄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풀타임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풀타임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세 가지 일을 풀타임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양육과 예술 사이에서 아이가 방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자기만의 방’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이지만, 어떤 이들은 거기서 나아가 그보다 크고 넓은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1931∼2019)은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 “내게 벌어진 가장 해방적인 일”이라고 했다.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는 1963년 태어난 딸에 대한 시 ‘이제 나는 아이와 영원히 함께하므로’에서 “내 다리는 우뚝 선 탑이었고 그 사이로/새로운 세계가 지나가고 있었지”라고 썼다. 글쓰기와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은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이의 존재를 통해 자신보다 더 큰 타자의 세계를 만난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다.
책에는 저자의 이야기도 담겼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그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됐을 무렵에야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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