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진 삼성전자 고문(62)은 19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 사옥에서 보청기를 낀 오른쪽 귀와 전혀 들리지 않는 왼쪽 귀를 번갈아 보여주며 차분히 말했다. 그는 “2006년 8월 회의 직후 쓰러졌다. 뭉크(1863∼1944)의 그림 ‘절규’의 한 장면처럼 세상이 빙빙 돌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무선사업부 해외상품기획그룹 상무였던 그는 휴대전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서였을까. 응급실에 실려 갔고, 돌발성난청 진단을 받았다. 아내는 “퇴사하라”고 했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후회 안 할 자신 있어?”라고 물었다. 업무에 복귀한 그는 2015년 자신의 꿈이던 삼성전자 사장이 됐다.
‘갤럭시 성공 신화’의 주역으로, 에세이 ‘일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11일 펴낸 고 고문은 경청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잘 들리지 않는 청력을 만회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와 질문을 들었다. “일에 투자하라”고 강조하는 신간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게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리겠다’고 묻자 허허 웃으며 답했다.
“좋은 약은 입에 쓰죠. 불평만 하는 사람은 어차피 이 책을 안 읽을 겁니다. 하지만 목표가 있는 청년에겐 필요한 조언이라 생각해요.”
성균관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마흔 살엔 불고기백반을 매일 사 먹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난했다. 성공할 방법은 일뿐이라 생각했다. 1984년 삼성전자에 입사하며 “사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포부와 달리 신입사원으로 칠판을 지우고, 명절 선물을 나눠주는 잡다한 일을 했다. 먼지를 뒤집어쓰며 연구소 사무실 이삿짐을 날랐던 그는 일본어를 잘하는 동료가 번역을 한 뒤 칭찬받는 걸 보며 좌절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50초 브리핑’을 시작했다. 매일 출근하자마자 상사에게 그날 할 일을 짧게 보고한 것. 업무 효율성은 물론이고 이를 반기는 상사와의 관계도 좋아졌다.
신간에서 그는 “창의력은 현장을 뛰는 ‘발’에서 나온다”, “일하지 않을 때도 목표를 생각하고 추구하며 노력하는 것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고 강조한다. 언뜻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얘기 같지만, 출간 1주일 만에 1만 부가 팔렸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 구매자의 38%가 20, 30대일 정도로 젊은 세대가 주목한 건 ‘무조건 열심히’가 아니라 구체적 계획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퇴근 전에 늘 다음 날 할 일을 시간 단위로 정리하는 ‘투 두 리스트(To do list)’를 만들었다”며 “퇴근 후엔 일본어, 주말엔 영어 공부를 하며 조금씩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고 했다.
“재테크 열풍은 우리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오전 9시만 되면 동료들이 전화로 주식 주문하려고 회의실로 들어가더군요. 하지만 일에 투자하는 게 제 길이라 생각했죠.”
그가 무선사업부장(사장)이던 2016년 갤럭시 노트7 배터리 발화 사건이 일어났다. 불안감이 치솟던 때 그는 과감하게 리콜이 아닌 단종을 결정했다. 당시 손해비용이 7조 원에 달했다. “회의에서 각 부서 담당자들이 ‘너희 책임이다’며 서로 삿대질하더라고요. ‘내 책임이다. 아무도 자르지 않겠다’고 하고 해결에만 집중했죠.”
그는 2022년 3월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2021년 급여와 상여금, 퇴직금을 포함해 총 118억3800만 원을 받았다. 기록적인 액수다. 그는 “월급쟁이로 시작해도 열심히 살면 이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청년들이 생각하면 좋겠다”고 했다.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사회에서 만난 좋은 선배들이 저를 키웠어요. 그래서 저도 후배들을 돕고 싶습니다. 한 명이라도 제 조언이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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