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난 것도 버리지 마라. 참외는 어떤 것은 상처도 나고 어떤 것은 곱게 자란다. 맛은 같다.”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마을에 사는 조수용 할머니(93)가 지난해 6월 참외 그림을 그리며 지은 글이다. 그림 속 참외 표면엔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나 있다. 병상에 오래 누워 지냈던 남편을 최근 떠나보낸 조 씨는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못생기고 흠집 난 과일도 그에겐 그림이 된다.
“저는 할머니들에게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아요. 그리고 싶은 것들을 이미 마음속에 품고 계시니까요.”
조 씨 등 선흘마을에 사는 여덟 명의 할머니에게 그림을 가르쳐온 전시 기획자 최소연 씨(55)는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 씨는 그림 수업을 담은 에세이 ‘할머니의 그림 수업’(김영사·사진)을 11일 펴냈다. 그는 “일상 속 사물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화폭에 담으려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했다.
그림 수업은 2021년 시작돼 올해로 3년째를 맞았다. 최 씨는 낮엔 할머니들과 모여 그림을 그리고, 밤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그림 옆에 쓸 글을 짓는 일대일 수업을 연다. 그는 “할머니들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달력 뒷면에 글자 연습을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해 다른 이들 앞에선 글쓰기를 머뭇거리는 할머니들을 위해 밤 수업을 열게 됐다”고 했다.
수업이 계속되자 할머니들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이런 것도 그림이 되느냐”며 그리기를 주저하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마당에서 자란 작물은 물론이고 신발과 자신의 속옷까지 꺼내 자유롭게 그리게 된 것. 최 씨가 지난해 6월 늦은 밤 강희선 씨(86) 댁에서 수업을 하던 때였다. 허리춤이 늘어난 낡은 팬티를 그리던 강 씨는 그림 오른편에 이렇게 써내려갔다. “세상 오래 살아보니 이런 것도 해보고 꿈에도 생각 안 했어. 그림 그리는 것.”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음속 말이 그림으로 나오니 이게 해방이주.”(강 씨)
최 씨는 “저는 늘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왔는데, 할머니들을 보며 삶의 태도를 다시 배웠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세요. 그래서 오늘 그리고 싶은 것을 내일로 미루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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