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완성도에 화제성 더해져
베스트셀러 된 ‘오펜하이머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카이 버드, 마틴 셔윈 지음·최형섭 옮김/1056쪽·2만5000원·사이언스북스
영화, 드라마의 원작이 출판계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이 8월 둘째 주 교보문고, 알라딘 종합 1위에 오른 건 주목할 만하다.
책은 2005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됐다. 에이전시는 한국 출판사에 “영화화 가능성이 있다”고 홍보했지만 영화로 만들어지는 책은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 출판사는 책의 가능성만 믿고 계약했다. 실제로 영화화는 수차례 무산됐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019년 영국 출신 배우 로버트 패틴슨에게 책을 선물 받은 뒤에야 영화화가 결정됐다.
2010년 국내에 처음 양장본이 출간된 뒤에도 판매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다. 몇몇 언론사에서 서평으로 다뤘지만 13년 동안 7000부 팔렸다. 1년에 평균 538부 팔린 셈이다. 이유를 유추하긴 어렵지 않다. 분량이 많은 ‘벽돌책’은 읽기 힘들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유명하지만, 한국에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누구나 아는 인물은 아니다. 또 과학자의 전기는 한국 독자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올 6월 출간된 특별판은 이달 17일 기준 5만 부 팔렸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이기 때문이다. 출판사가 무게와 가격을 절반 가까이로 낮춘 전략도 성공에 영향을 끼쳤다. 기존 양장본은 1613g에 달하고 4만5000원이다. 이에 비해 특별판은 1056g이고 2만5000원이다. 책장에 멋으로 꽂아두는 소장용이 아니라 실제 책 읽는 독자를 겨냥한 재발간 전략이 들어맞은 것이다. 미국 소설가 프랭크 허버트(1920∼1986)의 소설 ‘듄’(황금가지)이 2021년 동명의 영화 개봉을 앞두고 6권에 12만 원짜리 양장판으로 출간돼 고급화 전략을 취한 것과 정반대다.
중년 독자의 비율이 높은 것도 눈에 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구매자의 절반 이상(57.2%)이 40, 50대다.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 ‘친밀한 이방인’(2017년·문학동네)과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의 원작 소설 ‘마당이 있는 집’(2018년·엘릭시르) 구매자 가운데 20, 30대가 각각 58.6%, 58.2%를 차지하는 것과 대비된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은 픽션(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전기)이라는 점이 중년 독자를 끌어당긴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책 자체의 힘은 판매량 증가의 바탕이 됐다. 두 저자는 25년에 걸쳐 오펜하이머를 취재했다. 개인 문서는 물론이고 미 연방수사국(FBI)이 오펜하이머를 감시한 수천 쪽의 보고서도 참고했다. 친구, 친척, 동료 100여 명을 인터뷰해 오펜하이머의 삶과 원자폭탄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시대상을 엮어 심도 있는 시각으로 풀어냈다. 영화는 책의 시각을 그대로 따라갔고 평론가와 관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천재 감독 놀런의 탁월한 연출이 주효했음은 물론이다. 책을 안 읽는 시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은 책이 어떻게 영상과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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