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정원지기 엄마와 ‘정원수저’ 딸의 숲새울정원[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24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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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20여 년 가꾼 정원이 ‘아름다운 정원’ 상을 받았어요. 딸은 직장을 다니다가 늦깎이로 대학에서 정원을 공부하고 있고요.”

지인의 귀띔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원한 팔당호를 끼고 운전하다가 숲길 쪽으로 접어들자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의 벽돌집이 나왔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숲새울정원이다.

지난달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숲새울정원에서 엄마 신재열 씨(왼쪽)와 딸 최가영 씨. 남양주=김선미 기자

플록스, 아나벨 수국, 금꿩의다리, 운남국화, 베토니….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한여름의 꽃들이 꿋꿋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이라기보다는 야생의 위로를 전하는 정원이었다. 린넨 셔츠 차림의 엄마 신재열 씨에게서는 70대 여성의 여유로운 패션 감각이 느껴졌다. 40대 나이가 믿기지 않는 앳된 외모의 딸 최가영 씨는 상냥하고 나긋나긋했다.

여름 수목과 꽃이 어우러진 숲새울정원. 남양주=김선미 기자


숲과 개울을 바라보는 정원의 나무 그늘막에 앉으니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 집에서 갓 구웠다는 크루아상이 나왔다. 이런 숲속 응접실에서라면 여름 햇빛이 제아무리 따가워도 힐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늘막 곳곳에는 엄마가 오랜 취미로 한다는 서각과 도예 작품, 정원 용품들이 있었다. 딸은 이곳에서 정원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고 했다.

숲과 개울을 바라보는 숲새울정원의 나무 그늘막. 남양주=김선미 기자
숲새울정원 나무그늘막에서 엄마 신재열 씨가 정원의 꽃을 도기에 꽂는 모습. 최가영 씨 제공


●엄마의 노력과 딸의 도움이 어우러진 정원
지금부터 엄마는 ‘마마님’, 딸은 ‘수습이’로 칭하려 한다. 딸 가영 씨가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 활동을 하면서 지은 별칭이다. “인스타나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엄마’라는 호칭을 적는 게 좀 사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 ‘마마님’이라고 했더니 다른 분들도 엄마를 그렇게 불러주셨어요. 저를 ‘수습이’라고 한 건, 숲새울정원의 수습 정원사이면서 왠지 남은 생에도 정원을 마스터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서였어요. 정원에 있어서는 엄마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아서요.”

20여 년 간 숲새울정원을 가꾼 엄마 신재열 씨(왼쪽)와 엄마를 돕는 딸 최가영 씨. 남양주=김선미 기자

마마님이 서울에서 귀촌 후 20여 년간 가꿔온 정원은 2020년 산림청이 주최한 ‘대한민국 아름다운 정원’ 콘테스트에서 1등을 받았다. “엄마의 정원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될 즈음에 주변 분들로부터 콘테스트 참가를 제안받았어요. 출품을 결심하자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게 정원의 이름이었죠. 엄마와 저는 스케치북을 펴고 그림을 그려가며 브레인스토밍을 했어요. 우리 정원의 특징은 무엇일까 하고요. 우리 정원은 산 옆에 있어 숲을 품고 있고, 새가 많고, 옆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어요. 숲, 새, 개울 이렇게 적어보다가 얘기했어요. ‘엄마, 숲새울 어때?’ ‘아주 마음에 든다’. 그렇게 숲새울정원이 되었답니다.”

정원 마당에 설치돼 있는 숲새울정원 간판. 남양주=김선미 기자

2020년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운 정원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한 숲새울정원. 남양주=김선미 기자

딸은 자신을 ‘수습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지나친 겸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현재 대학에서 정원을 공부하고 관련 국제 심포지엄들에 참석하는 ‘찐 학구파’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갑자기 ‘경단녀’가 됐을 때, 허리가 안 좋던 엄마를 도와 정원 일을 시작한 게 늦깎이 정원 공부의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잔디 잡초제거, 제거된 식물들 가져다 버리기 등 힘쓰는 일들 위주의 소심한 가드닝을 하다가 엄마의 허락을 받아 하나둘씩 모종이나 작은 관목을 심게 됐다고 한다.

“정원은 제게 있어 엄마의 취미였고 엄마를 자랑스럽게 하는 무형의 자산이었어요. 그런데 정원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니 저는 대단한 ‘정원 수저’(금수저, 은수저라는 말처럼 정원을 물려받았다는 의미)였더라고요. 엄마의 정원이라는 최고의 서당에서 20여 년을 뛰놀던 ‘서당개’라는 걸 깨달았어요. 정원을 지켜온 크고 작은 나무들, 주변에 밀집된 숙근초들, 오랜 시간 스스로 터득해 온 엄마만의 손맛과 미적 감각이 숲새울정원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독일에서 3년 간 산 적이 있는데, 당시 한국에 전화해 엄마에게 드렸던 말씀이 생각나요. ‘엄마, 독일 길가에 꽃이 잘 심어져 있는데 동네에 별다른 정원은 없어. 엄마 정원이 여기 오면 짱 먹어.’ 해외를 다녀볼수록 엄마의 정원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지 알 수 있어요.”

숲새울 정원 풍경. 최가영 씨 제공

서울에서 꽃꽂이를 즐기던 마마님이 2000년 능내로 이사해 정원 가꾸기에 심취했을 때, 수습이는 미국 유학 중이었다. “당시 한국에 흔하지 않던 꽃씨들을 찾아 종종 엄마에게 보내드렸어요. 그중 하나인 매발톱꽃은 해를 거듭하며 교잡돼 매년 새로운 모습으로 숲새울정원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 매발톱은 씨앗으로도 알아서 잘 번지고, 한 번 자리 잡으면 건강한 모습으로 정원의 공간을 채워주거든요. 부지런한 벌들 덕분에 나타나는, 예측조차 안 되는 새로운 얼굴들에 큰 즐거움을 누려오고 있어요.”

숲새울 정원에 매년 새로운 놀라움과 기쁨을 주는 매발톱꽃. 최가영 씨 제공


●피트 아우돌프의 자연주의 정원에 매료된 딸
수습이는 대한민국 국가정원 2호인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의 정원 조성 작업에도 자원봉사로 참여했다. 그가 ‘팬심’ 가득 품는 세계적 정원 식재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79)가 지난해 이곳에 자연주의 정원을 조성할 때 식재 작업을 함께 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태화강국가정원에 갔던 때가 떠오른다. 나 역시 피트의 명성을 확인하러 갔었는데, 당시엔 식물을 막 심은 때라 땅 위의 식물 이름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식물들을 심은 손길 중 하나가 ‘수습이’ 최가영 씨였다니 감격스럽다. 공원과 공공정원에 시민 참여는 많을수록 좋다. 참여를 넘어 시민이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도하는 움직임이 더 늘어나야 한다.

지난해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의 ‘피트 아우돌프 자연주의 정원’에 식재작업을 한 최가영 씨(오른쪽). 최가영 씨 제공


세계적 정원 식재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왼쪽)가 태화강국가정원의 자연주의 정원을 조성할 때 참여한 최가영 씨(오른쪽). 최가영 씨 제공

수습이는 식재 모니터링을 위해 매달 태화강국가정원에 다녀온다. 그가 최근 찍어온 사진을 보니 어느덧 씨앗과 작은 식물들이 자라나 ‘피트풍 정원’을 연출하고 있었다. 꽃배초향 ‘블랙 에더’, 쇠풀 ‘하하 통카’, 털부처꽃 ‘스월’의 조화가 야생의 위로를 전하는 느낌! “한국인들은 성미가 급해 피트 아우돌프의 자연주의 정원을 그냥 풀밭 같다고 할까 걱정돼요. 하지만 한국인들은 열정만큼은 1등이니까 잘 홍보하면 대중의 큰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봐요.”

지난해 11월 피트 아우돌프 정원이 개장했던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의 모습. 울산=김선미 기자

올해 6월 최가영 씨가 식재 모니터링을 하러 다녀온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의 피트 아우돌프 정원. 1년 만에 식물들이 자라나 야생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최가영 씨 제공

마마님과 수습이는 지난해 독일과 네덜란드로 정원 탐방 여행을 다녀왔다. 피트 아우돌프가 조성한 정원들을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딸이 피트의 자연주의 정원을 워낙 좋아하니 나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식재 디자인이나 정원 배치를 보면서 둘이 감탄을 많이 했죠.” (마마님)

“모녀가 단둘이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정원과 식물을 보고 대화하는 매 순간이 소중했어요. 그중 백미는 피트의 초청으로 그의 정원인 훔멜로를 방문한 일이었어요. 모델 출신인 피트의 아내 안야가 해맑은 미소로 반겨주었죠. 훔멜로는 그 어떤 정원보다 독창적이고 놀라웠어요. 숙근초를 빽빽하게 채웠기 때문에 별다른 정원 관리를 하지 않고 그저 식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관찰한다고 해요.” (수습이)

지난해 독일과 네덜란드로 정원 여행을 할 때 엄마 신재열 씨(오른쪽)와 딸 최가영 씨 모습. 최가영 씨 제공

식재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은 1930년대 이래로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친숙한 주제였다. ‘독일 정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칼 푀르스터(1874~1970)는 자연 서식지와 비슷한 경관에서 식물을 재배하면서 최소한의 관리로 자라는 식물을 찾았다. 이 계보를 이은 인물이 네덜란드 출신의 피트 아우돌프다. 강건한 숙근초와 관상용 그라스류들을 재배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버려진 철길을 갈대와 야생화로 채운 미국 뉴욕 하이라인파크, 시카고 밀레니엄파크의 루리 가든, 독일 바일 암 라인의 비트라 캠퍼스 등 세계의 주요 공공정원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엄마와 딸이 정원에서 서로 돌보는 마음
수습이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유럽의 자연주의 정원에 흠뻑 빠져있다. 그래서 엄마의 정원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정원 공부를 하기 시작하니, 수습이도 보는 눈이 생기는지라 마마님의 정원에 태클을 걸기 시작합니다(웃음). ‘제가 감히…’라는 생각도 들지만, 생각이 모이면 뭐든 더 발전하기 마련이니까요. 식물은 엄마의 영역이지만 저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디자인에 더 신경을 쓰고 싶거든요.”

숲새울정원의 풍경. 최가영 씨 제공

가장 큰 의견 차이는 그라스를 정원에 들이는 문제였다. 몇 년 전 그라스가 국내에 도입됐을 때, 딸의 말을 듣고 참억새 품종을 심었던 마마님은 그 큰 덩치에 혀를 내두르고 “그라스는 우리 정원에 안 돼”라고 굳게 마음 문을 닫았다는 게 수습이의 말이다. 마마님의 생각은 다르다. “피트 아우돌프식 정원은 거대한 규모의 공공정원에 어울리는 것이지, 우리처럼 가정 정원에는 맞지 않더라고요. 심은 거 다 뽑아내느라 아주 애를 먹었어요.”

그럼에도 딸은 포기하지 않는다. “저는 아무래도 칼 푀르스터 같은 독일 숙근초 디자이너에서부터 이어진 피트 아우돌프의 정원 철학에 매료된 상태라 그라스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크게 자라지 않고 이삭이 아름답게 뻗어나서 엄마의 정원에 어울릴만한 그라스를 끊임없이 보여드리면서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엄마는 다시 조금씩 심어보시면서 시커매진 그라스의 씨송이에도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숲새울정원의 풍경. 최가영 씨 제공

딸이 추구하는 정원은 사람 손길을 덜 필요로 하는 정원이다. 그런데 엄마의 정원은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 관리해야 하는 정원이다. 허리도 안 좋은 70대 엄마가 정원에서 온종일 일하는 모습은 딸이 보기에 속상하다. “엄마의 지나친 노동에 잔소리를 자주 했더니 엄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어요. 정원 일을 즐기시는 만큼 엄마가 행복하다고 생각을 바꾸니 저의 잔소리도 잦아들게 되었습니다.”

신재열 씨가 직접 만든 도자기 인형. 돌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모습이 정원 일이 많은 숲새울정원에서 가장 팔자가 좋아 보였다. 남양주=김선미 기자

마마님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정원 일이라는 게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너무 힘든 일이에요. 딸이 쭈그리고 앉아 풀 뽑고 있으면 안쓰럽더라고요. 그래서 ‘얼굴 탄다, 하지 마라’고 말리죠. 엄마 입장에서는 저처럼 손 많이 가는 가드닝을 딸이 하는 걸 원치 않아요. 딸은 뭘 했다 하면 뭐든 열심히 해요. 식물에 대한 지식도 나보다 훨씬 많고, 외국어도 잘하니 새로운 식물들도 많이 추천해주죠. 얼마 전에 딸이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하하통카’라는 식물을 강력하게 권해서 심어봤어요. 단아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 왜 딸이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정원을 통해 좀 더 서로를 알아가는 것 같아요.”

엄마와 딸은 정원에서 서로를 안쓰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 모습이 사랑이었다. 남양주=김선미 기자

수습이는 말한다. “저에게 숲새울은 아름다운 선물이고 유산인 동시에, 감히 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원에 들어서면 오감으로 전해오는 식물들의 미려함이 잠시 스쳐가고, 엄마의 노동과 수고가 물밀 듯 떠올라 한숨이 쉬어지곤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숲새울 정원은 엄마의 인생이 담긴 걸작품이라는 겁니다.”

마마님은 “딸이 어차피 이 길로 들어섰으니 열심히 배워서 훌륭한 가드너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담백한 말이어서 오히려 엄마의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숲새울정원이 세월의 나이테와 함께 숲은 더 울창해지고 새는 더 많이 찾아오고 개울은 더 맑고 힘차게 흐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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