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위에서’ 80대 현대무용가 홍신자… 내달 서울세계무용축제 공연
“6·25전쟁때 허다한 죽음을 목도…
죽음과 탄생, 동전의 양면과 같아
잘 놀다 가는 삶, 장례 미리 치렀죠”
80대 노장의 느릿한 춤동작에는 날카로운 생이 깃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선을 타고 내려와 손끝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에선 검은 휘광이 번득이는 듯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23일 만난 현대무용가 홍신자 씨(83)는 “죽음은 내 춤과 인생의 안내자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순간을 아이처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가 주최하는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가 다음 달 1∼1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등 6개 극장에서 열린다. 총 9개국 23개 무용단이 26편의 작품을 공연한다. 인간 생애주기에 대한 고찰을 무용으로 풀어낸 ‘죽음과 노화’ 특집 작품 5편도 선보인다. 그중 홍 씨의 독무작 ‘이불 위에서’가 6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무대에 오른다. 2년 전 제주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홍 씨는 1973년 미국 뉴욕에서 ‘제례’를 공연한 후 백남준, 존 케이지 등 세계적 예술가들과 호흡을 맞춘 현대무용가다. 숙명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뉴욕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던 그는 우연히 미국 유명 현대무용단인 알윈 니콜라이 무용단의 공연을 접했다. ‘나도 저런 자유로운 춤을 추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27세에 뒤늦게 무용을 시작했다.
‘이불 위에서’는 죽음을 다루는 1부와 탄생을 다루는 2부로 구성됐다. 삶의 시작과 끝에 놓인 인간이 삶의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될 때 에너지를 춤으로 표현한다. 홍 씨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자리가 모두 이불이란 데 착안했다. 열 살 때 터진 6·25전쟁으로 허다한 죽음을 목도한 후 죽음은 내 생각의 근간을 이뤘다”고 했다. 공연은 구체적인 안무 노트 없이 즉흥 춤으로 구성했다. 홍 씨의 목소리를 콜라주한 음악 등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다. 무대디자인은 신소연 전통침선공예가가 맡았다. 얼기설기 늘어진 희고 기다란 끈과 바닥에 깔린 하얗고 깨끗한 이불 한 채가 무대를 이룬다.
공연 시작 전에는 그가 80세 되던 해 스스로 치른 장례식 퍼포먼스 영상을 내보낼 예정이다. 제주 바닷가에 지인을 모아놓고 1시간 동안 벌인 장례식을 담은 영상이다. 그는 “탄생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며 “태어났을 때 축하를 하듯 이 세상에서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겪고 ‘잘 놀다 가는 인생의 끝’을 기념하고자 장례를 미리 치렀다”며 웃었다.
삶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는 그는 꼭 다시 공연하고 싶은 작품이나 ‘죽을 때까지 춤추겠다’는 욕심 역시 없다. 홍 씨는 “그 역시 생에 대한 집착이다. 다만 관객과 만나는 순간이 여전히 너무 좋기에 앞으로도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하려 한다”고 했다. 다음 달 초 삶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은 책 ‘생의 마지막 날까지’도 출간될 예정이다.
“단지 ‘되는 대로 살겠다’는 마음으론 자유로워질 수 없어요. 삶을 공부의 터전이라 여기고 항상 비움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 오늘보다 내일 더 비우고, 그럼으로써 더 자유롭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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