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성지’ 탑골공원의 담장을 허문다면?[전승훈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1일 16시 54분


서울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서울 종로2가의 탑골공원은 어르신들이 온종일 바둑과 장기를 두며 시간을 때우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낮에는 무료급식 줄이 서고, 뒷골목엔 값싸게 소주나 막걸리 한잔할 수 있는 허름한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저녁에는 음습한 분위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찾지 않는 공간이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던 탑골공원이 도성 안에서 차지했던 위상은 현재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종로의 한복판에 있는 탑골공원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항상 사람들이 몰려드는 민의(民意)의 중심지였다.

또한 탑골공원 인근 인사동에는 종루가 있어서 한양도성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때를 알려주는 ‘시간의 중심’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시계탑이 설치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탑골공원이라고 하면 ‘3.1운동의 발상지’로 기억한다. 식민지 시대 민중들의 항쟁이 시작돼 들불처럼 번져나간 곳이 바로 탑골공원이다.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 음식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읽고 경찰에 잡혀갔지만, 학생대표를 비롯한 백성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읽고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탑골공원은 3.1운동 이전에도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탑골공원은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가 있었다. 고려는 개경에 도읍을 두었지만, 서울도 남경이라고 해서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로 여겼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과 남산을 중심으로 잡는 남북자오선의 중간지점인 탑골공원 자리에 흥복사를 세운 것이다.

탑골공원 일대 도시개발과정에서 출토됐던 석물들. 원각사 탑 주위를 호위하던 신장 인물상, 다리 기둥과 난간 등이다.
조선시대에도 태종은 서울 남북자오선의 중심축이자 사방이 트인 흥복사지 뒤편에 창덕궁을 세웠다. 이렇게 태종이 터를 잡으면서 그의 손자인 세조 때 흥복사지에 원각사를 세웠다. 불교에 심취했던 세조는 ‘석보상절’을 짓기도 했다. 탑골공원에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원래는 13층)을 세웠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고려시대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비슷한 모양인데, 정교한 조각과 문양을 새겨넣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오랜 세월에 풍화로 인한 표면 훼손이 심각한 상태여서 2000년에 유리 보호장치를 해놓은 상태다.

세조는 원각사 앞에 조선의 중심거리인 운종가(종로)를 닦았다. 이 운종가는 동쪽의 시작은 흥인문이고, 종점은 서쪽의 돈의문이었는데 이 선은 춘분, 추분을 알 수 있는 표식이 된 것이다. 이런 조선의 도시계획은 이 탑골공원에서 조선 사람들은 누구라도 1년 365일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원각사비
그러므로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삶의 중심지는 동대문과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종로의 한 복판인, 탑골공원과 종각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는 고려시대 흥복사였다가, 조선시대 원각사로 바뀌었고, 연산군 때는 이 절이 해체되었다. 연산군은 이 절터에 자신의 기쁨조로 활약하는 기생들과 악사들이 활동을 하는 ‘연방원(聯芳院)’을 세웠다.

탑골공원 뒤편에 악기를 파는 낙원상가가 들어선 것도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것이다. 또한 탑골공원 뒤편 창덕궁 앞길과 익선동에는 일제시대에 일자리를 잃었던 왕실의 악사들과 명창들이 자리잡고 조선의 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명맥을 이어오기도 했다.

2001년 탑골공원 시굴조사에서 발견된 우물. 조선 말기(대한제국기)에 조성돼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된 우물이다.
18세기 조선 후기 영조 때 실학운동과 조선학 연구 붐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많은 젊은 양인들이 조선의 미래를 토론하고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평생에 최치원과 조헌을 스승으로 생각했던 박제가,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들은 모여서 새로운 조선의 방향을 논의했는데, 이들이 모여서 토론한 곳이 바로 이 탑골이었다. 이들을 흔히 ‘백탑파’ 라고 불렀다. 이들은 1737년생인 박지원을 좌장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긴 지식인 모임이다. 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에 모여 살았다고 해서 ‘백탑파(白塔派)’라고도 하고,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제도를 배워 조선을 부국강병하게 하자는 주장을 펴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렸다.

조선 후기 정치가 혼란해지고 고종 때에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정치의 중심지는 잠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정치의 중심지는 덕수궁 일대의 정동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계속해서 민의의 정치는 모든 상권이 모여 있었던 종로에 있었고, 종로에서 가장 넓은 터를 가지고 있었던 탑골광장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이런 환경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포교 활동을 통한 대한인의 정체성 제고, 만민공동회로 불타오른 민의를 수렴하는 광장으로 역할을 했다.

1897년(광무 1년) 고종 때 영국인 브라운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을 지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어 동양의 불탑이라는 뜻의 ‘파고다 공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공원 내에는 팔각정도 함께 새롭게 지어졌는데, 1902년 고종 즉위 40년 기념 군악대 연주가 열렸다. 1913년부터는 황실 관현악단의 연주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황실 음악회가 열리던 팔각정 탓일까. 이후 공원 주변에 들어선 파고다 아케이드와 낙원상가는 악기 판매점으로 유명세를 떨쳐왔다.

1919년 3월 1일에는 탑골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민족대표 33인들과 함께 일본에 항쟁을 선언하기로 준비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점심을 먹고 종로경찰서로 들어갔다. 이곳에 모인 학생들은 3.1독립선언서를 읽으며 일본에 항쟁을 선언했다.

이들의 선언과 항쟁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3.1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정신은 일제강점기 종로의 상권 지키기로도 이어졌다. 당시 을지로는 중국 사람들의 상권이었고, 충무로는 일본 사람들의 상권이었지만, 종로의 상권은 대한인들이 굳건히 지켜냈다.

해방 후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 때에도 탑골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중심부는 고스란히 보존됐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서울수복을 할 때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서울 전체를 폭격하려 했으나, 당시 주일미국대리공사가 맥아더 사령관을 찾아가 청계천 이북은 폭격하지 말라고 부탁해 이곳이 온전히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3.1운동 기념 부조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읽는 학생과 시민 뒤편으로 탑골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보인다.
탑골공원은 전쟁 후에도 민의의 중심이었다. 4·19혁명 때나 국민들의 의견이 모일 때마다 그 터의 역할을 다했다. 또한 1968년 처음으로 세운상가에 국회의원회관이 개원하면서 당시 번화가였던 이 지역은 민의의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탑골공원은 귀족들이나 지배층들이 점유한 곳이 아니었다. 전체 백성들이 모여서 그들의 안녕을 빌었고, 어려움을 토로했으며 그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곳이다. 또한 외세와 싸울 때는 이곳에서 과감하게 싸울 수 있는 민의를 모아주던 곳이다. 이곳에서 근대가 일어났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광장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청은 탑골공원의 위상을 정상화하고, 어린이와 젊은이들부터 노년층까지 모두 함께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재정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른바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이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탑골공원의 담장 허물기가 하나의 방책으로 꼽히고 있다.

서울 도심에 조성된 첫 근대식 공원인 파고다(탑골)공원은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가 있고, 3.1운동의 성지인데도 불구하고, 주위를 둘러싼 담장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섬처럼 갇힌 공간이 돼버렸다.

탑골공원의 담장은 언제 생겼을까? 1967년에는 현대화 차원에서 공원 주변으로 상가 건물인 ‘파고다 아케이드’가 건설됐을 때 생겨났다. 그러나 이 상가가 문화재 경관을 망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1983년 철거됐다. 하지만 공원의 경계에 담장은 그대로 남게 됐고, 주변으로 무허가 좌판 등이 설치되면서 무질서하게 됐다. 특히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 원각사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들이 급증한 이후 고령층의 공간이 됐다.

그러나 탑골공원 주변의 담장을 허물어 시민들의 공원으로 개방된다면, 조명도 훨씬 밝아지고 젊은 층이나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는 도심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탑골공원의 역사와 새롭게 공원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학술회의가 14~15일 이틀간 열린다. 서울 YMCA회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14일에는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사회로 △탑골공원의 지정학과 역사(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위원, 장경호 강원대학교 교수) △3.1운동 정신과 독립정신(장우순 성균관대 교수, 나행주 건국대 교수) △3.1운동의 세계사적 위상(김지영 숭실대 교수,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연구사) △탑골공원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신운용 교수, 이종국 동국대 교수)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15일에는 차현진 예금보험공사 이사의 사회로 △흥복사지와 원각사의 역사적 의미 (최건업 교수-한국불교학회이사)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실학 시기의 백탑파의 활동 (최철호 서울성곽연구소장) △대한제국기의 탑골공원 (이민원 동아시아역사연구원장)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 선교사들과 조선 청년들 (김명구 월남이상재연구소장) △천도교는 어떻게 탑골공원을 지켰나? (정갑천 천도교 교무부장) △국외와 국내 대일항쟁의 상징- 간도의 대일항쟁과 관계 고찰(김동환 국학연구원 원장) △건축에서 탑골의 의미를 어떻게 투영할 것인가?(김개천 국민대학교 교수) 등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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