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한 도로 위를 나란히 달리는 버스. 그 안에는 좌석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승객들이 차곡차곡 앉아 어디론가 떠나고 있습니다. 버스의 위로는 동그라미가 질서정연한 전광판, 코카콜라 광고판이 보이지만 검은 무늬가 시선을 왼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있죠. 우리의 눈은 이 그림에서 가장 큰 형체, 벌거벗은 붉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마치 도시의 그 모든 풍경 밖에 서서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굳은 채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가지런한 도시의 질서 속에 도저히 자신을 담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죠. 그의 오른쪽 아래 또 다른 화려한 색깔의 인물도 버스 사이를 가로지르며 야성적인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서용선 작가(72)가 1989년, 1991년에 걸쳐 그린 ‘도시-차 안에서’입니다.
벼락처럼 떨어진 도시 속 군상들
서용선의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 작품까지 7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이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간 서용선은 ‘단종 애사’의 작가, ‘역사화’를 그린 작가 등 장르와 소재를 중심으로 읽히곤 했는데, 이 전시는 그런 도식적인 구분을 벗어나 조형 언어 자체를 돌아보자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전시장 1층에 가면 그가 1980년대부터 그린 도시 풍경을 먼저 마주하게 되는데요. ‘도시-차 안에서’를 비롯해 ‘숙대 입구 07:00-09:00’(1991년), ‘도심’(1997-2000년), ‘버스 속 사람들’(1992년)처럼 큰 캔버스에 과감하게 풀어낸 인간 군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격자무늬 속 불편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공간을 사각형, 마름모로 균일하게 구획 지어 버리는 격자 속에서 다양한 형태를 지닌 개인들은 비좁은 골목에서 터져 나올 듯하거나(도심), 좀비처럼 격자 사이를 조심조심 밟고 지나갑니다(숙대 입구).
그는 왜 이런 도시 풍경에 주목했을까요? 이 무렵 작가는 서울대 강사로서 생활을 병행하며 미아리에서 정릉, 숙대입구, 총신대역, 낙성대 등으로 이동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도시 풍경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는 서울이 고속 성장을 하며 강남이 개발되고 도시가 빠르게 형성됐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던 서울은 거짓말처럼 화려하고 깔끔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미아리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학교에 다니며 전쟁으로 사체와 뼈 더미를 보았던 기억이 채 지워지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당시 포화상태가 된 미아리 공동묘지가 망우리로 이전하면서 포크레인으로 시신을 파내고, 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뼈가 쌓여 있는 모습을 작가는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땅 위에 깔끔한 보도블록과 반듯한 빌딩들, 질서 정연한 도로가 놓이며 서용선의 도시 풍경은 묻습니다. 가지런한 격자무늬가 과연 그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겠느냐고요.
가슴 속 끓어오르는 응어리, 빨강
2층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역사적 사건을 다룬 회화와 자화상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형 인물화 ‘빨간 눈의 자화상’(2009년)입니다. 서용선 작가가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다음 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을 때 발표돼 주목을 받았고, 지금은 스크린골프 회사가 소장해 사옥에 걸려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되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어디에도 갇히지 않겠다는 듯 거침없이 그어나간 붓 터치가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굵은 선을 그릴 때면 잘못하면 어떡하나 망설이게 될 것 같은데, 그 망설임을 이겨내려는 것처럼 더 과감하게 그었다는 느낌도 전해집니다.
어느 선도 잘못 그은 것은 없다. 오히려 그것이 기준이 된다. 그 선들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
서용선 작가는 “어느 선도 잘못 그은 것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기준이 된다”며 “그 선들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했는데요. 결국 잘못 그었다고 생각하는 선이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빨간색을 칠할 때 쾌감을 느낀다. 어떨 땐 더 빨갛게, 더 빨갛게 칠하자는 생각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눈을 붉게 그렸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그는 “빨간색을 칠할 때 쾌감을 느낀다”며 “어떨 땐 더 빨갛게, 빨갛게 칠하자는 생각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의미, 혹은 길들여져야만 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 갇힌 빨간색의 부당한 상징성을 깨버리고, ‘빨강은 그저 빨강’이라고 외치는 눈입니다.
전시장 속 인터뷰 영상에서 그가 “(탄광촌 사람들의)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불만, 가슴 속의 응어리”를 담고 싶다고 언급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격자무늬와 정치, 사회가 개개인을 길들이려고 할 때 생겨나는 불만과 응어리. 그것이 우리의 인간성과 개별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몽사몽인, 의식과 무의식이 섞인 상태로’ 그리기도 했다는 자화상 역시, 그러한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을 포착하려는 노력으로 읽힙니다.
15일부터는 자연 풍경과 인물화, 나무 조각으로 구성된 이 전시의 3부가 새롭게 공개됩니다. 삶과 예술의 일치를 위한 작가의 탐구와 성찰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한 번 만나보세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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