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서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색과 함께 진화한 인류사 조명
원근법 탄생-광학 발전에 기여… 인류가 시야 넓히는데 큰 영향
◇풀 스펙트럼/애덤 로저스 지음·양진성 옮김/392쪽·2만1000원·글항아리
약 10만 년 전 석기시대 주거지 흔적이 남아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블롬보스 동굴에선 빨강, 노랑, 주황, 갈색을 만드는 데 쓰이는 광물 ‘오커(Ochre)’가 발견됐다. 전복 껍데기와 그 굴곡에 딱 맞는 돌도 나왔는데, 껍데기 안쪽은 오커로 뒤덮여 붉은색을 띠었다. 곳곳엔 해면골질(海綿骨質·골수가 차 있는 뼈의 부분)이 으스러진 흔적도 있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동굴에서 살았던 옛 인류가 전복 껍데기 위에 동물 뼈에서 나온 골수 등 유기물을 얹은 뒤 오커를 돌로 갈아 물감을 만들었을 거라고 추론했다. 옛 인류가 만든 물질이 접착제였는지 물감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약 10만 년 전 인류가 어떤 의도에서든 다채로운 색을 만들었고, 이 색은 우리 세계를 다채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 종합 월간지 ‘와이어드’ 선임 기자가 색과 함께 진화해온 인류사를 조명했다. 색의 역사는 문화, 예술만 발전시킨 게 아니다. 인류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하던 때부터 안료는 최고의 무역 품목 중 하나였다. 과학기술 발전사에서도 색은 빼놓을 수 없다. 초음속 제트기와 인공 골반을 만드는 데 쓰이는 금속 티타늄은 현대의 기초 색으로 꼽히는 하얀색을 만드는 데 쓰이는 광물이다. 티타늄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2개를 결합시켜 이산화티타늄을 만들어 낸 덕분에 석탄처럼 까만색이었던 티타늄이 하얀색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문화 예술 경제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가 만들어낸 색과 그 색이 불러온 변화를 담아냈다.
15세기 원근법의 탄생도 색의 진화와 함께 이뤄졌다. 이 무렵 화가와 색 제조업자들은 아마인유 등에 색소를 부착시키는 법을 깨달았다. 계란 노른자 대신 오일에 색소를 침착시키자 더 윤기 있는 페인트가 만들어진 것. 물감의 점도가 달라지자 겹겹으로 덧칠해도 뭉개지지 않는 선명한 색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물감의 발전 덕에 그림 속에 명암이 반영되면서 2차원 캔버스에 3차원 공간감이 더해졌다. 원근법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인간은 색을 만들고, 색은 인간 문명의 발전을 이끌어 냈다는 분석이다.
색은 광학(光學)의 발전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11세기 초 이집트의 과학자 알 하이탐은 색이 혼합될 수 있으며, 색이 지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팽이의 윗면을 여러 색으로 칠한 뒤 돌리는 실험을 통해 색의 혼합을 밝힌 것. 그는 또 물체가 강한 빛을 받으면 밝은 색으로 보이고, 어두워지면 바랜 색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하며 빛과 색의 관련성을 알아차렸다. 저자는 아랍의 물리학자들이 동시대 서구의 학자들보다 정확하게 이를 밝혀낼 수 있었던 건 책을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는 이슬람 전통 때문이었을 거라고 봤다. 당대 이슬람의 잉크 제작자들은 이미 일상에서 색을 혼합해 썼다.
저자는 인간이 색을 쓰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이 본 것 또는 상상한 것을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라며 “색을 사용했다는 건 새로운 지성이 완전히 꽃피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