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20세기 과학 발전 이끈 당대 ‘최고의 두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3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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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출신 수학자 폰 노이만… 현대경제학 게임이론 기초 세우고
양자역학의 개념 수학적으로 정리… 최초의 2진법 컴퓨터 설계하기도
학자로서 다양한 업적 세웠지만, 일상에선 한없이 서툴렀던 천재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아난요 바타차리야 지음·박병철 옮김/576쪽·2만9000원

중년의 폰 노이만.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중년의 폰 노이만.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당신의 통찰력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1943년 7월 미국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헝가리 출신 수학자 존 폰 노이만(1903∼1957)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거대 연구단지를 짓고 핵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지체되자 당시 ‘세상에서 가장 빠른 두뇌’라 불리던 노이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두 달 후인 9월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한 노이만은 먼저 핵 연쇄반응을 위해 구의 중심 방향을 향해 폭발시키는 ‘내폭형’ 폭탄의 설계를 기존보다 정교하게 설계했다. 또 전하를 띠고 있는 쐐기 모양의 물질을 플루토늄 주변에 삽입해 폭탄의 폭발력을 높이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처음 맨해튼 프로젝트는 우라늄을 사용하는 ‘포신형’ 폭탄 개발에 초점을 맞췄지만, 노이만의 합류로 플루토늄이 쓰이는 내폭형 폭탄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결국 1945년 7월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실험’에서 사용된 건 내폭형 폭탄이었다.

전공인 수학을 기반으로 물리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천재적인 사고를 펼친 노이만을 다룬 평전이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와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과학 전문작가인 저자가 노이만의 일생을 추적했다.

노이만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책을 읽고 싶어 도서관을 통째로 샀을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강렬했던 아버지는 노이만에게 철저한 영재교육을 시켰다. 노이만은 여덟 살 때 미적분을 척척 해낼 정도로 수학에서 두각을 보였다. 독일 베를린대 교수로 재직하던 노이만은 반(反)유대주의적 분위기를 피해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독일 출신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과 함께 일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집단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게임 이론’의 기초를 세워 현대경제학 발전에 공헌했다. 또 1932년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개념들과 공식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해 양자역학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1941년 최초로 내장 프로그램 방식과 2진법을 도입한 ‘에드박’을 설계해 컴퓨터 혁신도 이끌었다. 평생 논문 150여 편을 발표하며 수학, 경제학, 컴퓨터과학, 기하학,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폰 노이만(왼쪽)이 1946년 딸 마리나와 함께 여행을 즐기고 있는 모습.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의 저자는 “어린 
마리나가 보기에 노이만의 삶은 지나칠 정도로 바빴다. 노이만은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곤 했다”고 밝혔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폰 노이만(왼쪽)이 1946년 딸 마리나와 함께 여행을 즐기고 있는 모습.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의 저자는 “어린 마리나가 보기에 노이만의 삶은 지나칠 정도로 바빴다. 노이만은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곤 했다”고 밝혔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하지만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가득 생각을 채우며 운전한 탓에 교통사고를 자주 냈다. 한 곡선도로엔 ‘노이만 코너’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항상 공부에 매달린 탓에 첫 번째 아내와 사이가 틀어졌고, 결혼 7년 만에 이혼했다. 여러 학문을 건드리다 보니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동료 중엔 그를 “고매한 학문의 전당에 빌붙어 사는 하층민”이라 부르며 질투하는 이들도 있었다. 말년엔 암이 뇌까지 퍼져 ‘7+4’ 같은 단순한 산수 문제도 풀지 못했다.

천재마저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삶이란 난제일지 모른다. 1957년 2월 8일 마지막 숨을 거둔 그에 대해 두 번째 아내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노이만은 이 세상 누구보다 똑똑했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거의 원시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연의 커다란 수수께끼, 그러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은, 그런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

#폰 노이만#20세기#과학 발전#최고의 두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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