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남도의 소도시를 송두리째 바꿨다. 우리나라에는 없던 정원의 역사를 처음 썼다. 2007년 순천만 습지를 복원하고 2013년에는 순천만정원을 조성해 중앙정부도 시도하지 못했던 국제정원박람회를 열었다. 공무원 한 명이 도시의 경관을 바꾸고 도시의 브랜드를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작 본인은 모든 공을 노관규 순천시장에게 돌리지만…. 37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가 돌아온 최덕림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총감독(66) 얘기다.
18일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찾자 10년 전 박람회 때에는 보이지 않던 너른 녹지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류지를 변신시킨 시민문화광장이었다.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물길 옆에는 시민들이 맨발로 걸었다. 젊은 외국인 관광객도 눈에 많이 띄었다. 최 감독이 노란색 양산을 들고 나타났다. 양산에는 ‘순천하세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순천하세요’가 무슨 뜻인가. “‘순천처럼 하세요’라는 뜻이다. 순천이 생태관광 도시로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국내 지방자치단체들뿐 아니라 대만과 베트남 등에서도 벤치마킹하러 많이 온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올해 박람회의 차이점은…. “2013년 박람회는 순천만으로 도시가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에코 벽을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에 공공정원을 최초로 도입한 의미가 있었다. 올해 박람회는 저류지와 도로 등 공공시설을 정원으로 만들었다. 지방도시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생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외국 정원을 모방한 게 아니라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게 재창조했다. 하룻밤 정원에서 묵는 가든 스테이도 인기다.”
올해 4~10월 열리는 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지금까지 670만 명이 다녀갔다. 275억 원의 수익을 올려 이미 목표액(253억 원)을 넘어섰다. 그는 “생태 정원은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고 시민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보편적 복지”라고 했다.
-정원이 복지란 뜻인가. “동료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했다. 우리는 단순히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생태복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생태복지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복지라고 상기시켰다.”
-10년 전보다는 정원이 정돈된 느낌이다. “빽빽하게 심었던 나무들을 정리하고 400여 개 간판을 떼어냈다. 사실 정원은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일이 어렵다. 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맞아 시민들이 이곳에서 쉼과 여유를 느리게 즐겼으면 한다.”
1981년 순천시청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한 그는 2011년 ‘제1호 지방행정의 달인’(문화관광)으로 선정됐다. 2017년 퇴직한 후에는 ‘공무원 덕림씨’라는 책을 펴내고 순천만 혁신을 주제로 연간 200회 가까운 강연 활동을 펼쳐왔다. 이번에 총감독이 된 건 10년 전 박람회를 만들었던 노관규 시장이 지난해 다시 시장에 취임해 지역을 위해 일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총감독이 하는 일은…. “공무원 조직은 부서 간의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각 부분을 연결하는 부분이 취약하다. 게다가 순환보직 원칙 때문에 지속가능한 행정도 어렵다. 각 부분을 연결하고, 조정하고, 협력하는 게 총감독의 역할이다.”
그는 순천만에 생명을 불러넣어 순천의 도시 브랜드를 키운 주역이다. 2004년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으로 순천만 갈대밭에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는 데크가 설치됐지만 방문객 수는 미미했다. 고향 순천의 자랑거리를 고민하던 그는 순천만의 생태를 자원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곧 농민과 환경단체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가만있어도 되는데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 이라는 주변 공무원들도 비난도 받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전봇대 283개를 뽑아내는 등의 결단과 노력 끝에 이제 순천만에는 연간 3000마리가 넘는 흑두루미가 날아든다. 20년 전 20만 명 수준이던 순천만 습지의 연간 관광객은 이제 3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순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제1호 국가정원의 도시가 됐나. “2008년 당시 노관규 순천시장은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순천에 정원을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서 독일에서 정원가로 활동하는 고정희 박사에게 자료를 요청했다. 그때 고 박사가 보내온 보고서에 한 장짜리 ‘정원박람회’ 내용이 들어있었다. 간부회의 때 발표하니 참석자 대부분은 지나쳤는데 노 시장이 그 부분을 다시 설명해달라고 했다. 노 시장은 이후 세계 30여 곳의 정원을 둘러본 뒤 정원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순천만 생태를 보존하기 위해 정원을 조성하고, 그 부지를 이용해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연 것이다.”
정원도, 국제정원박람회도 생소했던 2013년 순천시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성공시켰다. 당시 행정안전부와 환경부가 외면할 때 유일하게 산림청이 지원했다. 최 감독은 부족한 예산을 ‘재활용’으로 채웠다. 고속도로 공사로 잘려 나갈 위기의 나무들을 옮겨와 심은 순천만정원은 2015년 국내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국내 ‘정원 열풍’을 이끌게 됐다.
순천이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의 모범 도시가 된 것은 공무원들에게 귀를 열고 권한을 준 지자체장의 리더십, 공무원들의 헌신, 시민 협조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노 시장은 이번에 퇴직 공무원인 최 감독을 정원박람회 총감독으로 임명하고 조직위 운영본부장을 맡은 백운석 국장에게는 파견공무원 75명을 선발하는 권한을 줬다.
박람회장에서 5km 떨어진 순천만 습지로 이동했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거대한 은빛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갯벌에서 게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가만히 걸으면서 새 소리를 듣는 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국내외 조경가들이 정원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라고 극찬하는 장소다. 순천만을 보호하기 위해 스카이큐브로 순천만과 정원박람회장을 연결시킨 최 감독은 “순천시의 최종 목표는 세계적 생태 도시로 거듭나는 것”이라며 “정원박람회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했다.
-관광지로서 순천의 가능성은…. “그동안 문화유적에 의존하던 관광형태가 정원과 습지, 식물원 등 생태관광으로 변하고 있다. 소득이 높아질수록 고요한 자연을 찾게 돼 있다. 앞으로 새를 관찰하는 탐조 관광이 활성화하면 순천만이 세계적으로 더 크게 부각될 것이다.”
-앞으로 계획은…. “이전에 해오던 강의를 계속할 것이다. 일 잘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희망을 갖는 게 행복의 조건이라고 한다. ‘공무원은 철밥통’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열심히 일했다. 혁신적인 공직문화가 되도록 후배들에게 그간의 경험을 나누겠다.”
그가 말한 행복의 조건에 ‘공무원 덕림씨’를 대입해 보았다. 9급 공무원에서 시작해 열정을 쏟아부은 그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확산시켜 남도 끝자락 소도시를 살려냈다. 이제 70세를 바라보는 퇴직 공무원이지만 세계적 생태도시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갖고 매진한다. 수많은 관료와 학자들이 지방소멸의 미래를 예측하지만 제2, 제3의 ‘공무원 덕림씨’들이 뒤를 잇는 한 그 미래는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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