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 K-히어로 ‘무빙’이 만든 길 [정양환의 데이트리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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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만화 & 드라마 ‘무빙’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
“너 이상하지 않아. 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희수가 봉석에게)

맞다. 분명 다르고 특별하다. 하늘을 날거나, 다치질 않는다. 누구보다 빠르고 힘이 세다. 그런데 왜, 그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걸까. 어째서 정상이 아닌 이상으로 여겨지는 걸까. 그건 우리가 다름을 다름 자체로 받아들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능력을 지닌 초인들 자신조차도.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무빙’이 최근 시즌1의 마지막 20회를 공개했다. 방영 내내 디즈니플러스 역대 시청 기록을 경신하더니, 일본 대만 미국 등 해외에서도 호평이 쏟아지며 순위가 급상승이다. 덩달아 2015년 연재했던 원작 만화도 카카오페이지·카카오웹툰에서 매출이 10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강풀 작가의 원작 만화 ‘무빙.’ 카카오웹툰 작품으로 카카오페이지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강풀 작가의 원작 만화 ‘무빙.’ 카카오웹툰 작품으로 카카오페이지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실 ‘무빙’은 원작부터 매력이 넘쳐났지만 불안요소도 적지 않았다. 원작 만화가이자 극본을 쓴 강풀 말마따나, 그의 만화는 실사화(實寫化)돼서 시원하게 흥행한 적이 없다. 지금껏 한국형 초인물이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던 전례도 쉬운 문턱이 아니었다. 허나 결과론적이지만, 역시 좋은 콘텐츠는 결국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걸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간 강풀 만화가 영화나 드라마로 주춤거린 건, 원작의 에너지가 너무 강했던 측면도 있다. 작가의 최대 매력 중 하나인 ‘텁텁함’이 제대로 살아나질 않았다. 그의 만화는 우리 시대의 명암을 마치 종이책 질감처럼 까칠까칠하게 살려내는 힘을 지녔다. 게다가 강풀은 요즘엔 보기 드문, 캐릭터에 의존하기보다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작가다. 하지만 스크린에선 이런 텁텁함은 뭉개지고 이야기의 흐름은 어정쩡해지곤 했다.


드라마 ‘무빙’ 현재 시점을 이끌어가는 희수(고윤정·위)와 봉석(이정하). 슈퍼맨처럼 초인들의 능력이 대물림된다는 설정은 이 작품을 끌어가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드라마 ‘무빙’ 현재 시점을 이끌어가는 희수(고윤정·위)와 봉석(이정하). 슈퍼맨처럼 초인들의 능력이 대물림된다는 설정은 이 작품을 끌어가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무빙’은 달랐다. 일단 강풀의 텁텁함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숙제를 말끔하게 풀어냈다. 해결책은 발상의 전환. 드라마는 그 무게에 얽매이지 않고 아예 시원스레 벗어던져 버렸다. 만화 ‘무빙’이 스산한 삶의 굴곡이 짙게 배인 작품이라면, 드라마 ‘무빙’은 이를 다리미로 싹 밀고 100% 깔끔한 오락영화로 완성시켰다. 극본까지 직접 맡은 작가가 자기 만화를 ‘초안’으로만 대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능력은 둘째 치고, 결의가 감탄스럽다.

그렇게 선보인 한국형 초인물 ‘무빙’은 익숙했던 미제(美製) 슈퍼히어로와는 생경할 만치 동떨어진다. 생각해보라. 배트맨이든 아이언맨이든, 탁월한 능력을 지녔는데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는 처지가 어디 있었나. 몇몇 가난한 초인도 없진 않지만, 대체로 신분을 숨기기 위한 선택일 뿐. 굳이 따지면 세상의 따돌림에 허덕였던 ‘엑스맨’이 그나마 닮았으나, 이 정도로 ‘현실 밀착형’ 초인들은 한국이니까 가능했지 싶다.

더구나 ‘무빙’은, 이런 설정들이 단지 상상에 그치지 않는단 메시지도 담뿍 담고 있다. 무빙 히어로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 사회가 빚어낸 살풍경을 시큼하게 드러낸다. ‘나와 다름’이 각자 다른 개성과 능력이 혼재하는 세상의 일부로 여겨지지 못하는 현실. 그건 ‘내 편’이 아니기에 차별과 경원의 대상으로 삼는 우리네 모습이다. 장희수(고윤정)가 악마 같던 일진들을 물리쳤는데도, 정의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멀찍이 떨어져 머뭇거리는 반 아이들처럼. 어쩌면 우린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건지도.

만화 ‘무빙’에서 희수가 정원고등학교로 전학오기 전 일진들과 싸우는 장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만화 ‘무빙’에서 희수가 정원고등학교로 전학오기 전 일진들과 싸우는 장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물론 드라마는 절대 인상 구기고 숨 참아가며 볼 작품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근사하게 깎고 멋지게 다듬은, 순도 높은 오락물이다. 눈 치켜뜨면 스리슬쩍 넘어가는 전개가 없진 않지만, 향연이라 불러도 좋을 캐릭터들의 매력이 잘 덮고 넘어간다. 특히 원작엔 없거나 작은 비중이던 등장인물을 생기 넘치게 살려내 엄청난 활기를 불어넣었다.

원작 만화와 드라마는 많이 다르다. 추어탕(만화)과 돈까스(드라마)마냥. 한배에서 났지만 애기 때 갈라진 일란성쌍둥이 같다. 허나 그 눈 코 입이 어딜 가겠나. ‘무빙’은 만화도 드라마도 가족 이야기다. 이 한국형 초인들이 스산한 인생을 사는 건 솔직히 씨족사회의 핏줄에 너무 강력히 얽혀있던 탓 아니었나. 자식을 위해, 연인을 위해 스스로 능력을 봉쇄하고 또 터뜨려야 하는 서글픈 슈퍼히어로. 안타깝게도 그들을 보듬어주는 건, 자신이나 가족이 ‘다른 사람’일 경우뿐이었다.

또 하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쓸모’다. 주로 민용준(문성근)의 입을 통해 반복되며 초인의 다름을 이용 가치로 판별하는 비정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아이러니하게도, 매번 그 평가를 견뎌야 했던 초인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나 상대를 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심지어 빌런들조차도. 언제나 잣대를 들이미는 건 스스로 ‘정상적’이라 여기는 세상이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잔혹한 시선은 정말 그들만 향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당신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이미 등 뒤에서 채점은 시작됐다.

드라마 ‘무빙’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 등장인물 셋.  이미현(한효주·위 왼쪽)과 김두식(조인성), 장주원(류승룡·아래). 이들은 봉석과 희수의 부모이기도 하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드라마 ‘무빙’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 등장인물 셋. 이미현(한효주·위 왼쪽)과 김두식(조인성), 장주원(류승룡·아래). 이들은 봉석과 희수의 부모이기도 하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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