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없었던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어떻게 출퇴근 시간, 약속 시간 등을 정할 수 있었을까. 물론 세종 때 제작된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런 시계는 사대문 안 궁궐 주위에 그것도 소수만 배치돼 특정 계층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산의 높은 봉우리에 해가 걸리면 대략 정오, 사대문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를 아침과 저녁의 기준으로 삼아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대일항쟁기 시절 남산공원에서는 매일 대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행사를 해왔다. 한양도성 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알람 시계였다. 이는 남산이 한양에서 ‘시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최근 ‘시간의 중심’인 남산과 함께 ‘공간의 중심’으로서 탑골공원이 주목받고 있다. 천문학자인 임정규(인하대 융합고고학과), 양홍진(한국천문연구원) 박사 등은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대회’에서 남산과 탑골공원의 천문지리적 관계성을 발표했다( ‘서울의 중심 탑골공원 입지의 융합적 분석’).
이에 의하면 남산과 탑골공원은 동일 남북 자오선(子午線) 상에 위치해 있다. 탑골공원 중심부와 그 남쪽의 남산(현재 남산타워 중심부)이 모두 같은 경도선(126.9883)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위치 관계는 시간을 측정할 때 매우 중요하다. 탑골공원에서 바라보았을 때 남산의 높은 봉우리에 해가 걸리는 시각이 가장 정확한 정오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천문, 지리, 역수에 관한 업무를 맡았던 관상감(서울 종로구 원서공원 입구) 역시 이 경도선 상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탑골공원 내 원각사 십층석탑은 규표(圭表) 역할까지 해줄 수 있었다. 규표는 정오와 정남북 방향을 측정할 수 있는 막대기 같은 도구를 가리킨다. 옛사람들은 막대기를 세워놓은 뒤 해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각을 정오로 삼았고, 정오 때의 막대기 그림자를 연장해 놓으면 바로 정남북을 가리킨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세조 임금 당시 12m 거대한 높이에 하얀 대리석으로 제작된 원각사 석탑은 백탑(白塔)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탑은 한양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평지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었는데, 가장 쉽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규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춘분과 추분 때 동대문으로 해가 떠올라
고대 국가에서 도시 혹은 도읍지를 건설할 때 남북 자오선은 방향을 정하는 기준선 기능을 해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대 국가일수록 자오선 방향을 따라 신성한 제단을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간 도로 역시 자오선과 평행하도록 건설했다. 물론 한양의 주요 남북 방향 도로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한양도성 지도인 ‘수선전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수선전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가로선(수평선) 한가운데 지점이 현재의 탑골공원(수선전도에서는 대사동 혹은 탑동으로 기록)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다시 세로선(수직선), 즉 남북 자오선을 그어 보면 정남쪽으로는 남산 봉우리로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한양도성 북벽 근처 휴암(鵂岩, 부엉이바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북쪽으로 더 멀리 그어 보면 놀랍게도 한양의 진산인 삼각산(북한산)과도 연결된다. 그러니까 탑골공원을 중심점으로 삼을 경우 ‘수선전도’가 전체적으로 남북좌우로 균형을 이룬 한양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천문풍수적 배경도 녹아 있다. 남산과 탑골공원이 남북 자오선이 되면, 자연스럽게 동쪽의 동대문과 서쪽의 서대문은 춘분과 추분을 알려주는 표식이 된다. 즉 춘분과 추분 때는 정확히 동대문 누각으로 해가 떠오르고, 서대문(궁궐 조성시 지형적 이유로 동서 수평선 상에서 약간 비낀 지점에 설립됐음) 쪽으로 해가 진다는 얘기다.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탑골공원에서 1년 365일의 계절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춘분과 추분, 동지와 하지 때 일출과 일몰 등은 방위를 중시하는 천문풍수에서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탑골공원은 울림이 큰 명당자리
탑골공원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종묘와 시전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등 한양 사람들이면 누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위치상 민의(民意)가 모이는 중심이기도 하거니와 그 울림도 매우 컸다.
우선 조선 개혁의 목소리도 이곳에서 터져 나왔다. ‘백탑’으로 불리는 십층석탑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였다고 해서 이른바 ‘백탑파’라고 불리는 젊은 지식인들(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 등) 은 중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주자학설을 버리고 주체의식과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여 조선을 부국강병하게 하자고 주창했다. 북학파, 이용후생학파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조선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9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린 3.1운동도 남산에서 오포가 울릴 때 이곳 탑골공원에서부터 시작됐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탑골공원은 천문 풍수가 아닌 지리 풍수로 보아도 한양의 중심점이 되는 곳이다. 풍수에서는 사방의 산을 기준으로 남북축과 동서축이 만나는 중앙 지점을 천심십도(天心十道)라고 해서 명당 혈(穴)이 맺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름난 명당 무덤이나 건물 중 이런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탑골공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옛사람들은 탑골공원의 천문적 위치뿐만 아니라 땅의 지리적 이점까지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원각사 석탑은 에너지 파동이 매우 큰 명당 혈에 자리잡고 있다. 풍수적 시각으로 보면 탑골공원에서의 울림이 큰 것은 이곳의 명당 기운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 도심 속 탑골공원에서 천문과 지리를 체험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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