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추석 성묘는 어떤 모습일까?[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30일 15시 01분


백년사진 No. 37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신문사도 신문발행을 멈추고 28일부터 연휴에 들어갔습니다. 대략 추석 2주 전부터 사진기자들은 관련 사진을 촬영해 지면과 온라인에 게재했습니다. 미리 성묘하는 모습,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해 재래시장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 연휴를 맞아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 모습, 서울역에서 귀성길에 올라 부모님을 만나는 모습 등을 스케치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서 추석은 어떤 사진으로으로 표현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신문을 뒤져 보았습니다. 100년 전 사진기자들은 추석을 앞두고 어떤 사진을 찍었을까요?

음력 날짜를 변환해보니 1923년 9월 25일이 추석이었습니다. 그 날 근처 신문을 살펴보았는데 눈에 띄는 추석 풍경 사진이 없었습니다. 약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옛날에는 추석이 없었었나? 그러고 보니 100년 전은 식민시대었습니다. 민족의 전통 풍습이자 일종의 축제인 추석 풍경을 신문에 싣는 것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추석 당일인 1923년 9월 25일자 신문에 작은 사진이 하나 실렸습니다. 억새인지 수크령인지 모를 가을 식물 뒤로 둥그렇게 떠 있는 보름달 사진입니다.

중추가절/ 1923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추석 보름달 사진
사진 밑에는 추석을 뜻하는 한자어인 ‘중추가절’이라는 단어만 덩그러니 붙어 있습니다.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다행히 사진 근처에 간단한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금일이 추석-경성은 매우 적막

금 이십오일은 음력 팔월 십오일 곧 추석이라 풍성풍성한 세상 같으면 경성 시내에서도 매우 경황이 좋겠지만은 금년 추석에는 집에 떡하는 광경도 드뭇드뭇하여 일반의 실생활이 얼마나 적막한 것을 알겠더라.
   
 
 
▶ ‘풍성한 시절이었으면 시내가 북적거리고 활기가 돌았겠지만 올해는 집에서 떡을 하는 광경도 보기 드문 것으로 봐서 일반 사람들의 실제 생활이 적막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예년에는 분명 추석 명절에 시내가 활기가 찼는데 이 해는 평소와 다르게 적막한 분위기이라는 겁니다. 이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답답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작은 지면이라고 하지만 기자들이 당시 상황을 왜 이렇게 간략하게만 기록해 놓은 것일까요?
 
▶ 추석 다음날인 1923년 9월 26일자 신문에 실린 글을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번 지진재해로 인하여 발생된 골계적 사실이 한두건에 그치지 아니하나 그 중에도 포복요절할 일은 동경 소석천구 금물상 모씨가 자경단원으로 활동하는 중에 부근의 주민들이 그 사람을 조선인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금물상 모씨는 당당한 일본인을 조선인에게 비유한 것은 오명이라고 하여, 마침내 자살하였다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 하면 이른바 조선인이 그와 같이 추악무비한가. 이 따위 일본인은 정말 정신병자가 아니면 일종의 괴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작일은 중추절임을 불구하고 시가 전체가 꽤 적막한 감이 불무하였다. 직접으로는 서도수재의 타격도 있을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일본 지진재해의 영향도 불무할 것이다. 앞으로 오는 경제계가 여하할지는 천기는 치워 오고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는 무수한 생령들의 호원성이 이막을 타래하는 듯한 감이 불무하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26일자 횡설수설(橫說竪說)
 
여기서 불무(不無)하다는 표현은 ‘없지 아니하다’, 즉 아주 많다는 뜻입니다. 추석이지만 도시 전체가 적막한 느낌이 아주 많다는 것이죠.

1923년 한반도에는 큰 수해가 발생했고, 일본 대지진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생겼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어수선한 시기였습니다. 명절의 평화로운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 횡설수설이라는 칼럼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간토대지진의 여파로 ‘한 일본인은 자신이 조선인을 닮았다’는 말에 자살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이 칼럼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100년 전 추석 풍경은 신문에서 찾을 수 없는걸까요? 사진이 제 기대만큼 신문에서 발견되지 않아 그 다음해인 1924년 추석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특별한 풍경 사진은 없었습니다. 비슷한 보름달 사진 한 장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 신문을 추가로 살펴보았습니다. 1925년 은 10월 2일이 추석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3일에 성묘 모습이 실렸습니다.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사진을 찾은 것 같습니다.
 
 
갔던 명절 다시와도…작일 추석날 수철리 묘지에서./ 1925년 10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없이 사진설명 그것도 묘한 여운이 가득한 제목만 있는 사진입니다. 마치 할 말은 많은데 할 수 없다는 뉘앙스 입니다. ‘갔던 명절이 다시 왔지만…어제 추석날 공동 묘지에서’이라는 내용 쯤 됩니다.    

성인 여성 2명과 왜소한 소녀 한명이 앉아 있습니다. 뒤쪽에서는 남성들이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 왼쪽에 나무로 만든 듯한 묘비에 고인의 이름이 한자로 써 있습니다. 수철리 묘지는 지금의 서울 금호동에 있던 공동묘지를 말합니다. 서울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 4대문 밖은 도심 외곽에 해당되어 논밭으로 활용되거나 공동묘지도 곳곳에 조성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사진에 따르면, 추석 명절에 집에서 차례를 지낸 시민들이 조상들의 분묘를 찾아 잡초를 뽑고 경배를 드리는 일정을 보냈던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이야 각 집안마다 변화된 방식으로 추석을 보내시겠지만, 100년 전에는 이런 풍습이 꽤 많았을 겁니다. 사진에서 제가 조금 주목한 것은 묘지 비석 옆 제단에 제수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명절 성묘를 갈 때면 집에서 준비했던 차례상과 별도로 술과 과일 송편 등을 싸가지고 간 후 간단한 차례를 한 번 더 지내는 게 풍습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척박하고 힘들었던 시를 보여주는 사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추석 풍경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100년 전 성묘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과 차이가 느껴지시나요?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평안한 연휴 마저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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