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예술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삶의 많은 문제를 이해하는 실마리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은 다소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랬다는 걸 이번 캐나다 몬트리올에 다녀오면서 알게 되었는데요.
한국계 큐레이터인 한지윤 씨가 예술 감독을 맡은 제18회 모멘타 비엔날레를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다녀왔습니다. 현장 분위기를 소개합니다.
약탈한 땅 위 이민자의 나라
우리 미술관은 동의 없이 넘겨진 토착민의 땅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곳의 땅과 물은 카니엔‘케하’카(Kanien’kehá:ka Nation)가 주인이었습니다. (…) 우리는 토착민과 다른 여러 사람들이 이 땅과 맺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 고리를 존중합니다.”
몬트리올의 한 대학 미술관에서 열리는 영화 상영회에 참가했습니다. 진행자가 마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듯 저 말을 읊고 난 뒤에야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상영회는 물론 전시 개막, 강연 등 많은 공공 행사에서 진행자들은 이러한 ‘선언문’으로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땅에 관한 인사’(Territorial Acknowledgment)로 불리는 이 선언문은 캐나다에서 과거 자행된 토착민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사회적 문제가 된 2015년경부터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문장 속에서 토착민, 프랑스인, 영국인 그리고 아시아인과 남·북·미 대륙 출신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에 모여 사는 캐나다의 상황을 그려볼 수가 있죠.
이런 몬트리올에서 올해 열리는 모멘타 비엔날레의 주제는 ‘가면극: 변신에 끌리다’였습니다. 한지윤 예술 감독은 이 주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면극은 사회의 정해진 질서를 잠시 동안 거꾸로 뒤집어 버린다. 가면극은 관습을 바꾸고, 차이를 유보하며, 경계를 허문다. 고대 관습에서 계절이 바뀔 때와 같은 기간에 열린 가면극은 사람들을 ‘가장’하도록 만든다. 메이크업을 하고, 위장하며,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역시 이런 주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지윤 씨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캐나다 몬트리올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1920, 1930년대 초현실주의 사진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지금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사진 부문 초청 연구원으로 파리와 몬트리올을 오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은 없습니다.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들
그녀의 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주제 의식은 결국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되기’를 시도하는 여러 예술적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제 아래 몬트리올 시내 16곳에서 23명의 예술가가 개인전 형태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중 일부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국주의에 희생된 백인 공동체 - 레미 벨리보 ‘역사의 피부 속에서. 조앙 뒬라지 되기’(2023)
프랑스 출신 캐나다 이주민이지만, 프랑스와 영국이 캐나다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 어느 국가의 전선에도 참여하지 않기로 해 강제 이주와 박해를 당한 ‘아카디아인’을 소재로 한 작품. 그들이 1960년대 만들었지만 지금은 잊힌 ‘아카디안 록’을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복원.
20세기 초 베트남에 주둔했던 세네갈 병사와 베트남 여성들이 이룬 가정 내 사연을 다룬 작품. 이때 세네갈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당했고, 세네갈의 젊은이들이 프랑스군에 징병 돼 베트남으로 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혼혈 후손들은 차별과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작가는 세네갈 다카르에서 이들을 만나 취재한 이야기를 4채널 영상 픽션으로 재구성했다.
이밖에 공권력의 차별적 폭력을 풍자한 히토 슈타이얼의 설치 작품 ‘소셜심’(2020), 환경·정체성 이슈를 다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부가 전시됐던 나오미 링콘 가야르도의 ‘예감, 종말의 가면극 3부작’, 앵무새의 말소리를 대사로 활용한 마라 이글의 애니메이션 ‘프리티 토크’ 등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작품들은 잊힌 존재,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공동체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유연한 태도가 ‘우리’를 엮어준다
그 중엔 한국 작가의 개인전도 있었습니다. 여성 국극을 소재로 한 연작으로 잘 알려진 정은영의 ‘여성 국극 프로젝트, 젠더를 빼앗아라!’가 몬트리올 콩코르디아대 ‘레너드 & 비나 엘런 갤러리’에서 열렸습니다. 정은영 작가의 북미 천 개인전이었죠.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였던 작품,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을 때 작품은 물론 신작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전시장 입구로 가면 사진 작품 ‘웨딩’을 만나는데요. 여성 국극 배우와 팬들이 가상의 결혼식을 하는 장면을 기록한 사진으로, 그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와 과감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사진을 본 다음 통로를 따라 가면 내부 전시 공간에 여성 국극에 관한 기록물을 되살린 ‘지연된 아카이브’(2018~2023)가 등장합니다. 전시장 벽면에는 여성 국극 기록물 속 이미지들을 거친 질감과 색채로 표현한 작품도 함께 전시됐습니다.
마지막 전시장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했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2019)이 펼쳐집니다. 플래시 라이트, 커다란 화면,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외면되곤 했던 사람들을 아주 강렬하게 전면에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새로 공개한 신작은 사뭇 다른 분위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전 작업들이 거칠고 강렬함을 담고 있었다면, 신작 ‘먼지’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시각 언어가 등장했습니다. 여성 국극 배우와 정 작가가 오래된 사진과 기록을 보며 대화하는 장면인데, 추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화면이 이어졌습니다.
한지윤 씨에게 이 점을 이야기하자, 그녀도 흥미롭게 생각했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결국 다른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는, 그런 부드러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고정된 관념 속 나를 벗어나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이해하는 것. 유연함으로 언제든지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 그런 태도로 무수히 다양한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번 비엔날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대화였습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와 캐나다를 오가며 다양한 문화적·지리적 맥락 속에서 자란 그녀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은 한국을 벗어나 세상 속 다양한 정체성들을 상상해보는 것 어떨까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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