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땅에 보슬비가 내리듯이, 건조하고 닫혔던 마음에 조금씩 설렘의 동요가 일어나며 한 편의 글은 시작된다. 마치 농부가 대기의 미세한 기운을 감지하면서 농작물과 교감이라도 하듯이. 때로는 한 문장이, 때로는 문장 전체가. 어떤 때는, 드물지만, 핵심이 되는 영상이 자리를 잡으며 그 설렘은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음계일 수도 있으며,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는 하나의 어조(톤)에 멈추기도 한다.”
주요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소설가이자 서강대 프랑스문화학과 명예교수인 저자의 글 ‘나는 어떻게 쓰는가’의 첫머리다. 글쓰기의 설렘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저자는 글쓰기는 “시작과는 달리 곧장 긴 낙담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글은 일단 이 부인할 수 없는 흥분 어린 희열로 열린다”고 했다.
저자가 ‘잠깐 비켜서서 자유롭고 싶을 때’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산문집으로는 1994년 낸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문학동네) 이후 29년 만이다.
저자는 1988년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소설 ‘오릭맨스티’ ‘첫 만남’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겨울, 아틀란티스’ 등을 내며 사회와 역사를 다채로운 문법으로 다뤄왔다. 산문집 역시 교단에 선 경험, 여행자로서의 체험, 좋아하는 작품 등을 소재로 한 단아한 문장이 빛난다. 자연과 종교,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통찰도 엿볼 수 있다. “삶의 무수한 이방인에 대한 성숙한 한 인간의 태도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무수한 다름의 타인과의 ‘동행’이 아닐까 합니다.”(‘현대를 극복하는 공감과 환대’에서)
글쓰기를 두고선 이같이 비유했다. “그러나 대체로 사막은 아름답고 순수하다. 그것이 모래사막이건 돌사막이건 바위 사막이건, 모두 다 나름의 개별적 아름다움과 버려진 지역에서 영글어 깊어진 순수가 있다. 그러나 그 안에 갇히는 것은 위험하다. 사막의 정의는 결여이기에 그곳에는 신기루가 있다. 사막과 신기루, 이 두 단어는 내게 자주 세상과 글쓰기의 은유였다.”(‘지금 생각나는 몇 가지 비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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