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창궐하던 15세기의 러시아
모든 것 잃고 시작된 성직자의 삶
해박한 지식-상상력으로 그려내
◇라우루스/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승주연 옮김/552쪽·1만8000원·은행나무
1440년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세례명은 아르세니. 더없이 총명했다. 네 살 때 주위에 “난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열네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예측했다. 역병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의 약제사인 할아버지 흐리스토포르는 아르세니를 거둬 의술을 가르쳤다.
의사가 된 아르세니는 아픈 이들을 무료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저는 이, 농인 등 환자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곧 그에게 슬픔이 닥쳤다. 연인 우스티나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절망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는 그에게 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앞으로 힘든 여정을 겪게 될 것이네. 자네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니 말일세. 아르세니, 이제 모든 것은 자네 사랑의 힘에 달려 있을 거라네.”
역병이 창궐하던 15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의사 아르세니가 고난과 역경을 겪은 뒤 민중을 위해 살아가는 성직자 라우루스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았다. 2012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직후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를 기려 제정된 ‘야스나야 폴랴나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러시아에서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에 비견되곤 한다. 역사,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상상력으로 약 600년 전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역병에 대항하는 의사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생각나기도 한다.
섬세한 표현과 시적인 문장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아르세니가 우스티나의 머리를 빗겨주는 이 장면처럼 말이다.
“그는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우스티나를 예술 작품 보듯 감상하곤 했다.…다시 머리를 풀어헤치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으로 빗어줬다. 머리카락이 호수이고 빗이 작은 돛단배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황금빛 호수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그는 그 빗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