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주류에 맞서는 혁명가’, ‘한국 현대미술의 리더’ 등 14일 92세로 별세한 박서보 화백에 따라붙는 별칭은 많다. 근 1세기를 살다 간 고인은 긴 생애만큼이나 많은 화제를 뿌렸으며,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흐름 속에서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개척해나갔다. 그 도정이 무려 70여 년이다.
이 불세출의 예술가는 삶 자체가 기(氣·에너지) 였다. 장년 시절에도 스스로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작업을 한다”고 밝힐 만큼 열정적으로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전 생애를 통해 장강(長江)과도 같은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평생을 작가로, 교육자로, 미술행정가로 산 고인은 한국 현대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삶 자체가 현대미술이라고 할 정도로 새로움을 향한 강렬한 의지는 기성 화단에 대한 도전과 실험으로 나타났다.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가진 ‘4인전’(동방문화회관 화랑)에서 행한 ‘반(反) 국전 선언’은 당시 국전 중심의 제도 미술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1931년생인 고인은 청년 시절 6·25 전쟁을 겪으며 전란의 참상을 목격했으며, 이때의 체험은 전후에 ‘비정형(앵포르멜)’ 화풍을 통해 육화(肉化)되었다. 김서봉, 김창열, 하인두, 장성순, 전상수, 안재후, 조동훈,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등과 함께 벌인 앵포르멜 운동은 전후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딛고 기존의 미에 도전한, 미술평론가 이경성의 말을 빌리면 ‘미의 전투부대’로서의 활동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상이 전위작가로서 고인의 초기 활동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살펴봐야 할 것은 미술행정가로서의 면모이다. 이 시기의 활동은 주로 한국미술협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인은 1970~1977년 한국미술협회(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으로, 1977~1980년은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앙데팡당’(1972년), ‘에꼴드서울’(1975년)을 창립하고 미협 주최의 ‘서울현대미술제’(1975년) 창설에 산파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당시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은 파리비엔날레 등 국제전 선발을 겸한 전시로 국제전 참가에 목말라 있던 청년 작가에게 인기가 있었다. 실제로 이 전시에서 이동엽, 허황이 파리비엔날레의 참가작가로 당시 심사위원인 이우환에 의해 선정된다. 하지만 주최 측의 사정으로 불발, 이태 뒤에 ‘카뉴국제회화제’에 출품, 국가상을 받게 된다.
고인이 오랜 화업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과 영예, 부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단색화의 국제적인 도약에 힘입어 한국 단색화의 대표작가인 고인의 작품세계가 화려하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인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2000년)을 필두로 ‘한국의 단색화전’(2012년·국립현대미술관), ‘단색화의 예술’(2014년·국제갤러리), 베니스비엔날레의 병렬전시인 ‘Dansaekhwa’전을 거쳐 영국의 화이트큐브 갤러리 초대전에 이르는 도정은 무려 50여 년에 이르는 박 화백의 ‘묘법’이 올린 예술적 개가임에 분명하다.
전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 화단을 위해 바친 고인의 열정과 노력에 옷깃을 여미며 삼가 경의를 표한다. 선생이시여, 부디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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