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작고한 2020년 수상 시인
고통 속에서 생명의 의지 표현
◇야생 붓꽃/루이즈 글릭 지음·정은귀 옮김/96쪽·1만3000원·시공사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수상자의 작품은 판매량이 반짝 늘곤 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5일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선정되자 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은 5일간 연간 판매량의 48배가 팔렸다. ‘특수’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지만 출판계엔 반가운 소식이다.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이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땐 상황이 달랐다. 당시까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시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첫 책은 그해 10월 수상으로부터 2년 1개월이 지난 2022년 11월에야 국내에 출간됐다. 이 때문에 교보문고가 2013∼2022년 10년 동안 각 수상 직후 1년 판매량을 분석한 통계에서 글릭은 책이 없어 순위에 포함되지 못했다.
‘야생 붓꽃’은 글릭의 작품 중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시집이다. 1993년 미국에서 출간된 뒤 글릭의 시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눈에 띄는 건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태도가 담긴 작품들이다. 마치 어느 정원사의 일기처럼 읽힌다.
“우편함 옆에, 갈라진 자작나무/이파리들이 지느러미처럼 주름 잡혀 포개져 있어요./그 아래, 하얀 수선화들, 얼음 날개,”(시 ‘아침 기도’ 중)
시인은 이른 아침 거닐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 수선화의 속 빈 줄기들”을 상상하면서 “야생 제비꽃 어두운 이파리들”을 생각한다. 그는 “삶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도 소생하려는 생명의 의지를 표현해온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수식 없이도 자연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감동이 다가온다.
“깨어났을 때 나는 숲에 있었어. 어둠은/자연스러워 보였어. 소나무들 사이로 하늘이/수많은 빛줄기들로 두터웠어”(시 ‘연령초’ 중)
화자인 이 식물은 키가 작은 탓인지 태어날 때부터 어둠이 익숙한 듯하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빛에 의지해 살아간다. 시인은 상상한다. 식물에 목소리가 있으면 어떨까. “혹시 내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식물이 태어난 그 순간 슬펐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나는 몰랐어”(〃).
“내 고통의 끝자락에/문이 하나 있었어//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 걸/나 기억하고 있다고”(시 ‘야생 붓꽃’ 중)
미국에 이민 온 헝가리 유대인의 후손인 글릭은 10대에 거식증을 심하게 앓아 7년 동안 심리 치료를 받았고, 학교도 순탄하게 다니지 못했다. 시인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 고통이 자연에 대한 묘사에 담겨 있다. 그는 광대수염꽃, 눈풀꽃, 실라꽃, 제비꽃, 개기장풀, 들꽃, 클로버 등 다양한 식물에 삶을 빗댄다. 김소연 시인이 글릭에 대해 “여러 생애를 겹쳐 산다”고 평가한 이유다.
글릭은 13일(현지 시간) 미국의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했다. 현재 글릭의 시집은 국내에 7권이 출간돼 있다. 오늘 아침엔 글릭의 시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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