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중요한 면접이나,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 순간에 누구나 긴장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청중 앞에서 노래나 악기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에 땀이 나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긴장이 지나쳐 사회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상사 앞에서 업무 성과를 발표하는 것이 두려워 승진 기회를 날린다거나, 발표 과제가 하기 싫어 학점을 포기하는 등 삶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 갈 경우에 그렇다. 가수나 연주가들 중에는 무대에만 올라가면 목소리가 안나오고, 손이 굳어 미래를 걱정하는 경우도 있다. ‘나만 이런가?’ 싶어 최대한 두려운 상황을 피하며 살아 왔다면 치료적 접근법을 참고해 보자.
남들 시선 의식, 과도하게 떠는 ‘사회불안장애’
대학생 김나래 씨(가명)는 가능하면 발표 과제가 있는 수업은 듣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발표 울렁증’이 심해서다. 긴장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손이 떨리면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쟤 왜 저래?”하고 수군거릴 것 같아 두렵다. 나래 씨는 “몇 년 뒤엔 취업 면접도 보러 다녀야 하는데 면접관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쓰러질 것만 같다”고 털어놨다.
사회불안장애 진단 기준
·사람들에게 관찰, 평가당할 때 공포나 불안을 느낀다. ·불안한 신체 증상을 들켜 창피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두려움을 억지로 참거나 회피한다. ·불안 상황을 실제 위협보다 과도하게 크다고 인식한다. ·불안으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영역에서 손해 입은 적이 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5)
남 앞에 서는 게 너무 긴장돼 삶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사회불안장애’ 증상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표 공포, 무대 공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잘하지 못하는 발표 공포는 가장 흔한 사례.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5)에 따르면 불안 상황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호소하거나 △회피 행동이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불안을 실제 위협보다 과도하게 인지하거나 △사회적 또는 직업적 영역에 심각한 손해가 발생할 경우 사회불안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
낯선 사람이나 이성과 대화할 때 과도하게 긴장하는 것도 사회불안장애 유형 가운데 하나다. 남들 앞에서 먹거나 마실 때 시선이 신경 쓰여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그렇다. 공중화장실에서 누가 쳐다보거나 소리가 날까 봐 볼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례도 꽤 있다.
사회불안장애는 불안을 느낄 때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며,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손발에 땀이 나고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타인에게 들킬까 봐 신체 감각에 예민해질수록 더 긴장하게 된다. 본인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알아채는 순간 더 떨리게 되고, 목소리 떨림이 증폭되는 악순환이 생긴다.
이럴 때 불안 증상을 숨기기 위한 ‘안전 행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최대한 목소리를 작고 빠르게 말하거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식이다. 또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가리기 위해 큰 안경을 쓰거나 화장을 일부러 짙게 하는 경우도 있다.
“실수하면 다 끝장” “모든 게 완벽해야”
40대 직장인 박준수 씨(가명)는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너무 긴장돼서 고통스럽다. 심장이 빨리 뛰고 목소리가 떨리는 게 들킬까 봐서다. 박 씨는 발표하다 떠는 자신을 보면 상사들이 자신을 발표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보고 인사평가를 안 좋게 줄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면 그는 승진도 못하고, 한직을 떠돌다가 언젠간 해고되는 상상을 한다.
비정상적 긴장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비합리적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실수하면 사람들이 무능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할 거라 여긴다. 게다가 이런 막연한 예측을 객관적 사실로 확고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에 실수하면 ‘모든 게 끝장난다’는 파국적인 생각도 더해진다. “발표를 못하면 무능하다고 회사에서 잘릴 것이다” “면접을 망치면 나는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이다”고 여긴다. 완벽주의에 집착하는 경향도 한몫한다. 100% 온전하게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여기기 때문에, 작은 실수 하나에도 ‘모든 걸 망쳤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진다.
사회불안장애의 습관적 사고 경향
지레짐작하기
주관적 판단으로 결론 내리고, 객관적 사실처럼 믿음 →“내가 떠는 걸 보면 발표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할 거야”
내 탓 하기
타인의 의도 없는 행동에 죄책감이나 불안감 느낌 →대화 도중 상대가 얼굴 찡그리면 “내가 재미 없어 그래”
강박적 의무감
사회적 상황에서 완벽주의 기준에 매달림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해” “남들 앞에서 실수하면 안 돼”
극단적 생각
실제보다 나쁜 결과를 확대해서 예상 →“발표하다 실수하면 창피해서 휴학해야 할 거야”
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걸까. 이런 속내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잘하지 못하면 자신이 한심하고 무능한 사람이 되고, 인생도 망친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과도하게 떨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100% 온전히 잘했다고 평가받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불가능한 기준을 가장 우선에 두고 자신을 ‘0%인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잘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 시선이 과도하게 신경 쓰이고 평가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남궁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재앙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더 긴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사회불안장애는 방치하면 만성으로 가기 쉽다. 다행히 ‘인지행동치료’라는 효과적 치료법이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왜곡된 인지 과정과 대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러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불안해지고, 어떤 비합리적인 사고가 나타나는지 알아야 한다.
만약 발표 중에 누군가 피식 웃었다고 상상해보자. 이때 비합리적 사고를 하는 이들은 대뜸 ‘내가 한심해서 그렇다’ ‘발표를 망쳤으니 나는 무능하다’고 믿어버린다. 왜 웃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심한 논리적 비약이 이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물어보면 “그냥 딱 보면 안다”는 식이다. 따라서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고, 자신의 느낌에만 의존해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긴장해서 나오는 신체 반응을 숨기려는 ‘안전 행동’을 파악해 중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목소리 떨림을 숨기려고 작게 말하거나 시선을 피하면 정작 말하려는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아 상대방에게 진짜로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또 이런 ‘안전 행동’을 하지 않아도 회사에서 잘리는 등 상상했던 최악의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지속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사회불안장애 치료에 특화된 교내 연구센터를 맡고 있는 안정광 충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말하는 내용이 아닌, 내 신체에 너무 많은 주의를 쏟는 게 문제”라며 “긴장될 때 주의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서 눈앞의 과제로 돌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불안한 상황을 잘 견디는 성공 경험을 쌓는 것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남부럽지 않은 성과를 내는 게 아니라 “우려했던 것보단 괜찮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남궁 교수는 “사회불안장애 환자들은 사람들이 긴장한 모습을 전부 다 알아볼 것이라고 우려하는데, 실제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 “발표 중에 숨이 막히거나, 연단에서 뛰어 내려오는 극단적인 상상을 했더라도, 실제로는 ‘떨렸지만 생각보다 할 만했다’고 느끼면 다음부터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극도의 불안 상태로 몸을 내던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치료자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극복을 시도해보는 경우라면 더 그렇다. 적당한 떨림을 유발하는 중간 정도 난도부터 시작해 강도를 높여가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가까운 동료 2, 3명 앞에서 말하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괜찮다고 판단되면 청자를 5, 6명 정도로 늘린다. 그 뒤엔 낯선 사람 앞에서 말해보는 식으로 난이도를 높이면 된다. 점차 수업이나 회의 시간에 질문하기, 소수의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발표하기,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하기 등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첫 단계가 너무 쉽다고 생각이 들면 여러 단계를 뛰어 넘어 시작해도 좋다.
성공 경험을 쌓으면, 자신이 걱정했던 것보다 자신이 과제를 잘 수행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미처 예상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심리치료에서는 실제 상황처럼 무대나 연단 등 장소를 꾸미고 리허설을 시키기도 한다.
긴장은 적어도 약 5분 뒤 서서히 소멸
시간이 가면서 긴장감이 잠잠해진다는 걸 경험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개인차는 있지만 대부분 긴장은 약 5분 정도 최고조를 찍고, 점차 감소 된다. 그런데 긴장 수준이 내려가기 전에 금방 관둬버리면, 긴장이 줄어드는 걸 체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강하게 떨리던 기억만 남아 증상이 심각해질 수 있다.
발표, 면접, 공연 연습 영상을 촬영해 관찰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이 생각했던 것만큼 긴장한 모습이 끔찍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 도움이 된다. 다만 불안감을 낮추는 근본적 치료가 아닌, 발성이나 화법 교정을 강조하는 기술적 접근만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취업 면접 등 어쩔 수 없이 압박적인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경우라면 일시적인 약물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심장 두근거림을 낮추는 약이나 항불안제, 항우울제 등도 때에 따라 도움이 된다.
모든 치료법을 총동원한다고 긴장을 100%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치료 효과에 대해서도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수준으로 가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안 교수는 “예능인 전현무나 유재석 씨처럼 달변가가 되겠다는 식으로 치료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실패 경험이 쌓여 더 불안해질 수 있다”며 “떨리지만 ‘적당히 잘하자’ ‘대충해도 된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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