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시설 직접 본 美 핵물리학자… 美 ‘외교적 실패’의 순간들 분석
2002년 제네바 합의 파기 이후… IAEA 몰아내고 핵 개발 본격화
북, 미와의 관계 개선 시도할 것… 과거 정책 비판적으로 되짚어야
◇핵의 변곡점/시그프리드 헤커 지음·천지현 옮김/612쪽·3만 원·창비
“우리가 만든 걸 좀 보시겠습니까?”
2004년 1월, 북한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 안. 리홍섭 북한핵과학연구소장이 당시 미국 에너지부 소속 국립 연구기관인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자격으로 방북한 저자에게 이렇게 물으며 구두 상자만 한 적갈색 금속상자를 꺼내 보였다. 상자 속 또 다른 상자를 열자 투명 테이프로 뚜껑을 밀봉한 유리병 두 개가 보였다. 리 소장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병에 우리의 생성물, 플루토늄 금속 200g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 제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암시였다. 재처리된 플루토늄은 원래 액체 상태다. 이를 핵무기 제조에 쓸 때 플루토늄을 합금해 금속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2002년 10월, 북한이 미국과 체결했던 ‘북-미 제네바 합의’(1994년)를 파기한 지 1년여 만에 가동이 중단됐던 영변의 원자로를 재가동해 이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2004∼2010년 북한의 핵시설을 둘러본 미국의 핵물리학자가 펴낸 이 책은 변변한 패 하나 없던 나라 북한이 미국 본토를 겨냥할 핵무기 보유국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책 제목이 보여주듯 저자는 미 정부엔 “관리 가능한 정도의 위험만 감수하면 평양이 핵무기 폐기로 가는 외교의 길을 나서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북핵 문제를 둘러싼 외교 실패의 책임을 북한 탓으로 여겼던 미국 측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와는 다른 입장이다. 한마디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사전에 막지 못한 미국의 결정적 실수들을 분석한 책이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장과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CISAC) 센터장을 지낸 저자가 꼽은 가장 치명적인 변곡점은 조지 W 부시 정부가 ‘북-미 제네바 합의’를 파기한 2002년이다.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체결한 이 합의는 ‘북한의 핵 개발 동결’을 골자로 한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 활동을 즉각 중지하고 관련 시설을 해체하는 대가로 미국이 북한에 에너지를 원조해주는 외교적 거래였다. 무엇보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동결 감시 활동에 협력해야 한다는 조항도 이 합의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 합의는 2001년 9·11테러가 벌어진 뒤 삐걱댄다. 부시 정부가 “국제적인 테러 세력의 후원자”라며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3대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 미 정보당국이 입수한 첩보는 합의 파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을 위한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입수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기만행위가 전제했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이 합의를 파기한 미국의 선택은 근시안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이듬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IAEA 검증단을 북한에서 쫓아냈다. 이전까진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개발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합의 파기 후 “(미국은) 북한이 훤히 보이게 폭탄을 제조하는 동안 팔짱을 끼고 서 있기만 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2001년 이후 역대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한 이유에 대해 “미래에 미국이 더 나은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워싱턴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저자는 북한이 경제 개선을 위해 전략적으로라도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설 거라고 보는 입장이다.
책엔 북한의 핵시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목격자의 묘사가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원제는 ‘Hinge Points: An Inside Look at North Korea’s Nuclear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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