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늘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온종일 작품을 지키고 서 있는 ‘지킴이’들입니다. 이분들은 관객이 작품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하지만, 또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마치 그림자처럼 저의 동선을 피해 움직이기도 합니다. 관객이 없을 때면 조용히 작품 앞에 서서 감상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죠. 기분이 좋은 날이면 이분들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지킴이’의 시선에서 미술관의 풍경을 풀어낸 책이 나왔습니다. 패트릭 브링리가 쓰고 김희경, 조현주가 옮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최근 출간된 이 책을 보고 미술관에 가는 경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 미술관 경비원이 되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저자 브링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뉴요커’에 입사해 선망받는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두 살 많은 형 톰이 있었죠. 수학 천재로 불리는 형을 저자는 어릴 때부터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슬픔에 잠긴 그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하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미술관 경비원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총 13개의 챕터로 이뤄진 책은 브링리가 경비원으로 채용돼 출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아침 배정받은 구역으로 가서 온종일 전시관을 지키며 작품과 사람들을 지켜봅니다.
7만 평이나 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전시된 작품만 300만 점이 넘고. 브링리는 구석기 시대부터 이집트, 중세와 르네상스, 인상주의 그리고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넘나듭니다.
위대한 그림이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책의 매력은 미술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브링리라는 한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작품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들은 옆으로 밀쳐두고, 나 혼자 오롯이 감각에 몰입해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브링리의 서술에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감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가로등, 작은 물웅덩이, 다리, 교회, 1층에 난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광경들에 자신이 녹아서 스며드는 느낌말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이국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개를 퍼덕이는 평범한 비둘기마저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리를 걷는다.
어딘가 시적이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거리를 누비면 마법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분주하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온갖 자극에 진정한 나는 마비되어버리는 것 같은 순간들을 벗어나 잠시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브링리는 형의 부재 앞에서 그런 경험을 찾아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 그것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마주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을 찾았던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경험을 그는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미술사를 부전공했던 연극배우인 브링리의 어머니는 두 형제를 미술관에 데려간 뒤 흩어져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찾곤 했습니다. 형 톰을 떠나보내고 모자는 미술관에 갔고, 한참 뒤 브링리는 ‘피에타’ 앞 엄마를 발견합니다.
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배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결국 자신
작품 앞에서 혹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 혹은 동료 경비원들을 보면서 겪는 감정들을 브링리는 솔직하게 또 감성을 가득 담아 전달합니다. 그런 그를 보며 미술관에서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요.
책에서 브링리가 설명한 작품 감상법을 소개합니다. 저 역시 가장 처음엔 이러한 방법으로 작품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특이점을 찾아내려는 유혹을 버린다. 뚜렷한 특징을 찾으려 하면 나머지 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고야가 그린 초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의 천재성도 있지만 색채와 형태, 인물의 얼굴, 물결처럼 굼실거리는 머리카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
예술과 만날 때 처음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 ‘이건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엔 브링리의 말처럼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그림에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또다시 보면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뒤 그 이야기를 돌아보면, 결국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반추할 수 있게 됩니다. 미술관에 가는 것은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죠.
브링리는 그렇게 10년을 메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곳에서 수천~수만 년 전의 흔적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사람들, 각양각색의 배경에서 일하러 온 동료 경비원들을 받아들이며 그는 점차 슬픔을 정리하고 미술관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책은 그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무엇을 경험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한 번 브링리의 이야기로 만나보세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