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시간여행 이야기이다. 공상과학(SF)에 고전적으로 등장하는 ‘미친 과학자’의 계보를 잇는 주인공은 양자역학을 이용한 시간여행 실험을 반복한다. 그러나 ‘결맞음’이 풀리지 않아 하현서 박사는 누군가 계속 관측해주지 않으면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는” 괴상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화자는 우연히 주인공 하 박사와 눈이 마주쳐 박사의 마지막을 관측하게 된다.
하 박사는 여러 측면에서 서양 문학의 고전적인 비극적 영웅을 연상시킨다. 서구 문학 사상 첫 작법서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비극은 희극보다 우월하다. 그러므로 우월한 장르인 비극의 주인공 또한 일반 사람보다, 특히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우월해야 한다. 보통보다 우월한 주인공의 운명이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 ‘꺾어지는’ 줄거리를 갖는 장르가 비극이다.
영국의 고전 연구가 새뮤얼 버틀러는 ‘시학’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운명에 맞서 싸우다 파멸하는 주인공”이라는 버틀러식 비극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보다 더 유명해졌다.
하 박사는 정신력도 강인한 인물이다. 시간여행이라는 연구 주제가 국내외에서 비웃음당하고 무시받을 때도 하 박사는 실험을 감행한다. 원자 하나부터 시작해서 물건으로, 생물체로 옮겨간 실험이 매번 성공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도 실험에만 몰두한다. 연구비의 압박 속에 지원이 끊어지자 자기 자신을 피실험체로 삼아서라도 연구를 완성하려 애쓴다. 그리고 결국 실패한 실험의 결과로 파편화돼 사라진다. 그가 남긴 것은 실험을 할 때마다 산 중턱에 만들어둔, 제목과 같은 ‘확률의 무덤’뿐이다.
하 박사가 원했던 것이 연구의 성공과 부와 명예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 박사는 자신을 스스로 내던져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닿으려 시도한다. 저자는 이런 측면에서 매우 고전적인 비극적 영웅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는 영웅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가 만든 무덤 옆에 또 하나의 ‘확률의 무덤’을 만들어 추모한다. 이러한 결말까지 소설은 클래식한 비극적 영웅서사시의 특징을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도 화자도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실패하는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본인도 물리학을 전공한 여성인 입장에서, 아직까지 여성 과학자들에게 조금 더 엄격한 과학계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실패한 영웅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매우 다정하다. 하 박사는 누군가 계속 관측해주지 않으면 우주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처해 있다. 화자는 어쩌다 눈이 마주쳐서 하루를 함께 보내게 된 하 박사를 계속 관측해야 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속 바라봐주고, 손을 잡아주고, 글자 그대로 주인공의 존재를 유지해준다. 시간여행 SF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모험 위주의 전개보다는 비극적 영웅과 그를 추모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의 고전적인 관계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가볍게 펼쳐들고 오랫동안 생각하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SF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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