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에 문화 입힌… 다자이 오사무의 펜[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2일 01시 40분


세계문화유산 빛나게 하는 건
예술과 인문학적 가치 아닐까
다자이, 다자이/다자이 오사무 지음·박성민 옮김/320쪽·1만5000원·시와서

최근 일본 시즈오카현 ‘후지산세계유산센터’를 들렀을 때 눈길이 가는 소개 문구가 있었다. 후지산이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 일본의 예술 작품 덕이라는 것이다. 후지산을 묘사하고 예찬한 작품들이 유네스코의 마음을 끌었고, 등재에 큰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회화, 하이쿠뿐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1909∼1948) 같은 근대 문학 작가들의 작품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쓰여 있었다.

‘다자이, 다자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인 다자이의 자전적 작품을 엮은 선집이다. 특히 눈길이 가는 건 1938년이 배경인 ‘부악백경’이란 단편이다. 부악은 후지산의 별명이다. 백경은 100가지 풍경이란 의미다. 다자이가 후지산 기슭에서 2개월간 지내면서 썼다.

이호재 기자
이호재 기자
“방의 커튼을 살짝 걷어 유리창 너머로 후지를 본다. 달이 있는 밤은 후지가 창백하게 물의 정령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나는 한숨을 쉰다. 아아, 후지가 보인다. 별이 크다. 내일은 맑겠구나.”

주인공 ‘나’는 어느 밤 후지산을 바라보고 내일 날이 맑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살며시 커튼을 치고 그대로 잠이 들려다가 만다. “맑다고 해서 딱히 이 몸에 별다른 것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니 웃겨서, 혼자 이불 속에서 씁쓸히 웃는다”고 냉소할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자이는 1935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1936년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상을 타지 못해 좌절했다. 복막염으로 입원하고 마약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소설에선 삶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후지산의 절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사실 ‘나’가 후지산을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다. 처음에는 후지산의 풍경을 마치 목욕탕 벽에 그려진 그림 같다고 경멸한다. “연극의 무대 배경 같은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후지산의 풍경에 젖는다. 후지산 인근 사람들과 교류하고 한 아가씨와 결혼식까지 치르며 닫혀 있던 ‘나’의 마음은 점차 열린다. 후지산이 근사하다고 감탄할 정도로 마음이 누그러진다.

다자이가 주목하는 건 자연의 영속성이다. 후지산을 깎아내리다가 아름답다고 말하며 갈대처럼 휘날리는 ‘나’의 마음과 달리 후지산은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나’는 “순간마다 변하는 내 마음속의 애증이 부끄러워지면서 역시 후지산은 멋지다”고 돌아본다. 다자이가 후지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

지난달 24일 사단법인 제주학회는 ‘한라산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활용 방안 탐색’을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라산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으로 인정받았지만, 예술과 인문학적 가치는 제대로 발견되지 못했다는 평가 때문이다. 이날 학술대회에선 문화유산적 가치를 부각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아직 한라산 하면 외국인들이 바로 떠올리는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언젠가 정지용(1902∼1950)의 시 ‘백록담’을 읽고 한라산을 찾았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세계문화유산#후지산세계유산센터#다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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