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풍수의 현장
이영림 작가의 현대미술전 ‘Unfolded’/ 이필숙 작가의 서예전 ‘행만리로(行萬里路)’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실외보다는 실내를 주로 찾기 마련이다. 인체 생리적으로 겨울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을 읽음으로써 간접 체험하는 ‘와유(臥遊) 여행’이나, 실제 자연물의 기운을 담고 있는 그림, 문자 예술, 조각품 등을 실내 전시장에서 감상하는 ‘와유 풍수’가 활발해진다. 예술작품 속에서 작품에 내재된 기운과 감흥을 하는 행위는 예술 풍수라고도 한다. 올 겨울엔 분야가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이 예술풍수적 시각에서 눈길을 끈다.
● 글씨에서 그림을 보다
흔히 예술풍수 하면 자연을 묘사한 그림에서 풍수적 느낌을 알아채고 즐기는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예술풍수는 글씨, 조각품, 도자기 등을 모두 포함한다. 재료가 무엇이든 작품 속에서 발휘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경지를 느끼는 풍수적 활동이 바로 예술풍수이기 때문이다.
글씨 속에서 풍수적 흥취를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6층(12월 6일~11일)에서 ‘행만리로(行萬里路)’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미당(美堂) 이필숙 작가의 네 번째 서예전이다.
작가의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이 있다. ‘시 속에 그림이 들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소동파가 당나라 때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남전연우도’ 그림을 보고 남긴 말이다. 바로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이 이필숙 작가의 ‘화양연화(花樣年華)’다. 영화와 TV 드라마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혹은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한다. 작가는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을 글자로 표현했다”는 말처럼, 마치 글씨가 곧 꽃이 되고, 꽃이 글자로 피어나는 듯한 강렬한 흥취를 일으킨다.
예술풍수적 감각으로는 꽃으로 상징되는 화(火)의 기운이 절정에 이른 듯하다. 화의 기운은 흔히 화려함, 예술적 창조성, 종교적 환희 등을 상징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화의 기운으로 ‘서예의 꽃’을 관객에게 선물한다고나 할까.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감상해보자. 중국의 대표적 전원시인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를 작품화한 것인데, 서예 작품에서는 포용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토(土)의 기운이 활성화돼 있다. 서울대 안재원 교수(인문학연구원)는 작가의 작품 자체를 도화원으로 설정한 후,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뜻하는 ‘人(인)’자 글씨들을 찾아서 세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각각의 ‘人’들이 펼쳐 보이는 몸사위를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들의 몸사위에서 작가의 붓사위를 만나게 된다. 작품이 곧 작가라는 해석이다.
오랜 세월 추사 김정희의 서화(書畵) 미학을 연구해온 미당 이필숙은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자연 혹은 자연의 도(道)는 서화가의 기운(氣韻), 정신(精神), 풍격(風格) 등과도 일맥상통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품 속에 작가의 기운이 실려 있다는 예술풍수적 시각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기운을 만나 교감을 나누거나, 작가가 작품 속에서 표현해낸 기운을 느낌으로써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는 게 예술풍수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예전은 문자를 조형화한 예술작품에서 생동하는 기운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작품들이 서로 교감하는 공간
서울 한남동의 ZIP739 2층 아트라운지에서는 공간과 작품이 상호 교감하는 특이한 경험을 제공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가나아트가 주관한 이영림 작가의 ‘Unfolded’라는 제목의 개인전이다(2024년 1월7일까지).
작가는 비정형의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즉 기존의 정형화된 사각형 캔버스가 아닌 다양한 형태와 모양을 갖춘 캔버스에서 실험적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먼저 작품에서 2차원의 평면적 회화에서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각형 혹은 비정형으로 잘라진 나무 위에 색채를 올리거나, 화면 위에다 곡선의 철제와 나뭇조각 등을 입히는 등으로 3차원의 입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어찌 보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해체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어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 또한 하나의 캔버스가 된다. 작가는 작품이 놓인 자리, 즉 전시 공간 자체를 하나의 캔버스로 상정한다. 그리고 전시 공간과 작품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면서 자아내는 풍경에 집중한다. 여기서는 작품이 어떤 위치, 어떤 각도에 배치되는가가 중요하다. 작품이 공간과 상호작용을 통해 활성화되는 중요 변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감상자(보는 이)의 시각이 작품 및 공간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인지적 과정을 소중히 여긴다. 작가는 스스로 작품의 범위나 의미를 한정 짓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이 놓인 장소,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의 시선과 움직임 같은 외적인 행위들까지 자신의 예술 작업으로 포함하고자 한다. 그 결과 감상자는 주체적으로 작품이 놓인 공간에 개입하게 되고, 감상자에 의해 공간 속에 놓인 작품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의도다.
작가는 2012년 싱가포르 라셀예술대학교를 졸업한 후 작가로 활동하기 이전에는 인지심리학 박사과정(이화여대 심리학과)을 수료한 경력이 있다. 그가 작품 속에서 사람의 ‘인지 과정’을 특히 중요시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사실 작가가 공간과 작품의 상호작용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매우 풍수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감상하는 관객의 인식까지 예술활동 속에 끌어들이는 행위 역시 철저히 풍수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풍수에서는 대상물(혹은 작품)이 공간에서 어떻게 배치돼 있느냐를 매우 중시하며, 그 배치 구도에 따라 보는 이에게 길하거나 흉한 기운을 부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풍수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관객이 이 갤러리에서 작품 감상을 한다고 치자. 관객은 먼저 갤러리 공간에서 범상치 않은 에너지장, 즉 명당 기운이 펼쳐져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를 동양 전통의 목·화·토·금·수 오행(五行)으로 분류해보면 목기(木氣)에 해당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재료는 목기운인 나무다. 전시회 한쪽 사이드에 배치한 작가의 작품들의 경우 나무의 결을 깊이 품은 셰이프트 캔버스 위에 색깔을 겹겹이 혹은 섬세하게 입힌 형태다. 색깔 역시 연초록, 짙은 초록, 옅거나 짙은 파랑 등 모두 목기운 일색이다. 즉 작품과 공간이 모두 같은 기운으로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활성화되고 있다. 관객은 이곳에서 목기운이 주는 생명성, 활동성, 역동성을 느끼는 기운 체험을 하게 된다.
전시 공간의 또다른 사이드에서는 화기운이 강한 ‘빨강색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세 작품은 가운데 세 개 점 모양의 작품을 중심으로 상호 교감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전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목 기운을 받아 목생화(木生火)라는 기운생동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에서 동양 전통의 오행(五行) 기운을 읽어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보통 자연 풍경이나 구체적 물상은 목·화·토·금·수라는 5가지 특징적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한가지 오행이 강조되거나, 여러 오행 기운이 섞여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표현한 예술품 역시 감상자에게도 똑같은 기운이 전달된다는 게 동양화의 기본적 감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행 기운을 동양의 산수화 혹은 정물화가 아닌, 난해하다고 소문난 현대 추상화에서도 체험하고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와유 현장이 이영림 작가의 전시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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