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2〉 동네에 깃든 인문학
서울 상계도서관 ‘노원을 걷다’ 탐방
문인-학자가 지역 역사와 문화 소개
참가자들 “동네 아끼는 마음 생겨나”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
조선 정조 때 문인 유한준이 남긴 말이다. ‘동네’만큼 이 말이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 동네 집값은 알아도, 동네에 숨은 인문학적 가치는 모르고 살기 일쑤다.
서울 노원구 상계도서관(구립)은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노원을 걷다’ 프로그램(총 15회)을 개최해 주민들이 동네를 만나도록 했다. 노원에 26년째 사는 구효서 소설가를 비롯해 노원과 인연이 깊은 문인, 전시기획자, 학자들이 노원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주민들과 함께 곳곳을 탐방했다. 역시 주민인 김은지 시인이 동네 책방을 이끌었고, 하응백 문학평론가는 노원의 문화유산을 소개했다.
문인들은 ‘노원의 문학’을 들려줬다. 김응교 시인은 수락산 주변에서 말년을 보냈던 천상병 시인(1930∼1993)의 시와 삶을 전했다. 김 시인은 “천 시인은 늘 변두리의 마음으로 살았다. 서울에서도 북쪽 변두리에 있는 노원구의 지역성이 시인에게 ‘바깥’을 사유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했다. 김 시인은 지역 주민들에게 노원구 곳곳에 세워져 있는 천 시인의 시비를 찾아 읽어볼 것을 권했다.
거리와 공원, 미술관 등을 탐방하면서 주민들은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것을 돌아봤다. 올해 6월 1일엔 무심코 지나치는 거리의 예술 작품을 만났다. 중계근린공원엔 주송렬 작가가 만든 ‘유아독존’이란 조형물이 있다. 거대한 책가방을 형상화한 조형물은 가운데가 숫자 ‘1’ 모양으로 텅 비어 있는 모습이다. 해설을 맡은 김세현 전시기획자는 “1등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노원구엔 공공 조형물 473점이 설치돼 있다. 거리의 미술관을 발견하고 즐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동네를 아끼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겼다고 했다. 오랫동안 골목상권을 지킨 지역 상인의 입을 통해 지역 상권의 역사를 듣자 평범한 시장도 달리 보였다. 30년 넘게 노원에 산 신유정 씨(56)는 “골목 상권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 만든 우리 동네의 문화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구효서 소설가는 강연에서 “목적 없이, 일부러 꼬불꼬불하게 길을 천천히 거닐어 보라”고 권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걷기만 했던 길을 의식하고 걸음으로써, 우리 옆에 무엇이 있고 누가 사는지 발견하고 변하라”고 했다. “몰랐던 우연성과 타인을 만나 머물러 보세요. 놀라움은 매일의 일상 속, 우리 동네 길 위에 있습니다. 느리게 천천히 걸어야만 발견할 수 있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민들은 ‘다른 눈’을 갖게 됐다고 했다. 최근 상계도서관에서 만난 문지영 씨(47)는 구 소설가의 말을 따라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일부러 가장 느리게 가는 길을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러자 20년 넘게 동네에 살면서도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곳들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이제는 동네를 다닐 때 혹시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내가 가보지 않은 다른 길은 없는지 유심히 살펴보는 다른 눈을 가지게 됐어요.”(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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