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치료제 개발 기나긴 여정 담아
연구서 상용화까지 수십 년 걸려
장기적 과학기술 투자의 큰 결실
◇암 정복 연대기/남궁석 지음/336쪽·2만3000원·바이오스펙테이터
영화 ‘러브 스토리’(1970년)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이 백혈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후 한국에서 이 줄거리는 멜로 드라마의 한 축이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영화, 소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백혈병 때문에 사망하는 젊은이를 소재로 활용했다.
그런데 이젠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기 어렵다. 백혈병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예전처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백혈병 생존율은 55.2%로 절반을 넘는다. 만성 골수 백혈병으로 범위를 좁히면 5년 생존율이 90%에 가깝다. 다른 여러 암을 살펴봐도 생존율은 과거보다 눈에 띄게 향상됐다. 1970년에 암을 보는 시선과 2023년에 암을 보는 시선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제는 암이라는 병을 다루는 태도도 조금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암 정복 연대기’는 암 치료 물질을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노력하는 과정을 속속들이 짚어 나가며 소개한다. 암은 몸속의 어느 한 세포가 불필요하게 쓸데없이 계속 자라나면서 주변의 다른 세포들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는 병이다. 그러므로 세포가 자라나는 원리를 처음 발견해서 그것을 조절하는 방법을 상상한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방법을 여러 가지 기술을 활용해 실현하고, 암세포가 자라나는 것을 조절하고, 방법을 개선해 실용화하고, 성능을 끌어올리는 여러 단계의 노력들이 복합적으로 엮여야 약 하나가 탄생한다.
‘암 정복 연대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요함의 힘이다. 처음 어떤 과학 원리가 주목받은 지 60, 70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그 원리를 활용한 약이 나오기 시작한다. 첫 치료제가 나온 후 다시 20, 30년이 지나고 나서야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실용화가 이루어진다. 요즘 주식 투자의 세계에서는 초단타 매매를 해서 수익을 내는데, 과학에 대한 투자는 60년 이상 이어져야 한다니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투자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투자의 수익은 사람 목숨을 구한다. 그러니 긴 안목의 장기적인 과학 기술 투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투자가 어떻게 성과로 이어져 가는지 예시로 살펴보기에도 좋다.
물론 쉽지 않은 질병인 암을 다루면서 그 세부를 상당히 깊이 살펴보는 책이기에 조금 어려운 내용도 담고 있다. 그나마 일부 항암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기에 내용이 걷잡을 수 없이 방대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후반부로 갈수록 전문 지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페이지를 넘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만한 대목도 분명 있다. 하지만 막연히 암에 안 걸리려면 무슨 채소를 먹으라든가, 무슨 물건을 많이 쓰면 암에 걸린다는 속설이 너무 많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귀하게 눈여겨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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