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인형을 어깨에 얹고 ‘키티 섹시 낸시 앙’을 외치는 발랄한 여성이 있습니다. 이 문장만 보고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20년 전부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온 그를 방송인으로 아는 이도 많지만 낸시 랭의 본업은 ‘팝 아티스트’입니다.
7년 전 사기 결혼 피해를 겪고 인생의 위기에 봉착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팝아트’라고 합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협박 등 누구보다 가혹한 고통을 겪은 그가 전 세계 여성을 위로하는 ‘스칼렛’ 시리즈를 선보인 데에 이어 올여름엔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해 살아갈 힘을 얻게 된 낸시 랭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https://youtu.be/dKpwI2elMx0?si=AJk35xjIdXLZ09Cp)
―2023년은 ‘팝아티스트’로서 바쁜 한 해였습니다. “올여름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백남준 선생님이 비디오 아트를 창시했다면 낸시랭은 스페이스 아트를 창시하겠다는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입니다. 누리호에 탑재된 큐브 위성을 개발한 연구팀을 이끈 한국항공대 오현웅 교수(항공우주 및 기계공학부)와 ‘나라 스페이스’ 박재필 대표와 협업한 전시였어요.”
―‘스페이스 아트’는 낯선 장르인데요, 처음 착안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우주와 팝아트를 결합한 예술의 한 장르라고 생각해주심 돼요. 우주와 팝아트를 접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2년 전 누리호 1차 발사 실패 때였어요. 우주 산업은 과거엔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잖아요. 하지만 최근엔 우주 산업이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일론 머스크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죠. 국가라는 소수 권력이 점유했던 우주 기술을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는 현상이, 대중적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팝아트’ 정신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된 이미지를 차용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는 ‘팝아트’는 미국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현대미술의 한 장르입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낸시랭이 전공과 무관한 팝아트를 선택한 건 그것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술과 대중, 상업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 팝아트에 매료된 이유는요? “우리가 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중적인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담아 작품으로 표현한 게 ‘팝아트’라는 장르예요. 이미 대중들의 눈에 익은 어떤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상업적이고 가장 대중적이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어요. 팝 아트는 예술 앞에서 계급과 계층, 성별과 나이 등의 경계를 허물어 줍니다. ‘그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예술’을 지향하죠.”
낸시랭이 팝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뗀 건 2003년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되지 못하자,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빨간 속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6년 8월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병행하는데요, 당시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한 건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연예인 아닌 일반인들도 방송에 많이 나오지만 2000년대 초반 낸시랭이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는 파격적이었어요. “그때 욕을 엄청 많이 먹었어요. 당시만 해도 가수, 배우, 앵커, 개그맨 같은 사람만 텔레비전에 나왔거든요. 사람들은 연예인도 아닌데 왜 방송에 나오냐면서 엄청난 욕과 악플에 시달렸어요. 근데 지금은 보세요. 의사, 변호사, 심지어 일반인들도 다 TV에 나오잖아요. 선구자적인 무언가를 시도했다고 생각해요. 처음이었기에 욕을 많이 먹었던 거죠.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계 문제도 있었어요. 돈을 벌지 않으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죠. 방송을 한 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어요.”
―20여년간 26회의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셨어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낸시 랭을 예술가 보다는 방송인, 구설수로 알고 있어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땐 아날로그, 흑백TV의 시대였는데요,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1968년 전시 브로셔에 직접 쓴 문구) 앤디 워홀은 그 시대에 그런 혜안을 가졌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아티스트였어요. 근데 앤디 워홀의 인생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급으로 파파라치, 스캔들, 구설수, 화제를 몰고 다녔단 말이에요. 지나고 보면 저의 인생 궤적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거라 생각해요.”
―보통 작품 활동하실 때 영감은 어디에서 받나요. “삶의 특정한 순간, 저의 내면 깊숙이 꽂힌 아이디어에 충실한 편이에요. 팝아트 작가라고 해서 팔릴 만한 작품만 하진 않아요. 저의 꿈, 상상력, 시대의 문제, 철학…. 모든 게 영감이 될 수 있어요. 최근의 제가 ‘우주’에 꽂혀있는 것처럼요.”
팝 아티스트로 승승장구하던 낸시랭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2017년 사기 결혼 피해를 당한 것인데요. 당시 낸시랭이 당한 사기 결혼 사건은 세간을 뜨겁게 달궜고 하루에도 100건 이상의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이 일로 그에겐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10억 원의 빚까지 생겼습니다다.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그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팝아트 덕분이었습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 등의 피해를 겪은 낸시 랭이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스칼렛’ 시리즈를 2020년 선보인 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터키 이스탄불, 미국 마이애미, 싱가포르 등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스칼렛’ 시리즈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스칼렛은 채도가 굉장히 높은 빨간색을 뜻하는 말인데, 데미 무어가 주인공인 영화 ‘스칼렛’이 있어요.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할 때 ‘주홍글씨’로 번역됐어요. ‘낙인찍히다’는 의미죠. 영화 속 주인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여성인데 마녀사냥을 당하고 낙인이 찍힌단 말이에요. 제가 사기결혼과 여러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몰아쳐 왔었어요. 그때의 전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했을 정도로 암담한 고통 속에 있었거든요.
그때 처음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당한 일들, 저 혼자 당한 게 아니더라고요. 같은 고통을 겪은 전 세계 여성들을 떠올리며 작업했어요.”
―‘스칼렛’을 전 세계에 선보인 이유는요? “각 나라의 문화와 법이 다르잖아요.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나라에선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어떤 나라에선 피해 여성에게 더 큰 벌을 주곤 해요. 각 나라의 문화, 관습, 법이 달라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지만 예술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른 인종, 관습, 문화를 가졌음에도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는 양심이란 게 있지 않을까. 그걸 건드리는 게 예술의 역할일 거예요. 사람들이 저의 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본인 스스로의 양심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스칼렛’은 제게 정말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
―작품을 통해 회복, 치유를 경험하신 거네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만 매몰된단 말이에요. 주변에서는 가만 놔두질 않죠. 끝없는 고통 속에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다행히 옆에서 절 붙잡아주고 도와준 고마운 지인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죠. 1초가 100년처럼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
―10억원의 빚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시거든요.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원금은 1원도 못 갚았어요. 매달 천만 원 넘게 나가는 이자를 갚고 있어요. 제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정 수입이 없는 예술가가 감당하기 너무 버겁죠. 전시회에서 작품이 모두 팔려도, 그 돈을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이자 갚는 데만 다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의욕이 꺾이는 시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극복하셨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가 쓰지도 않은 사채 이자 갚느라 6년, 7년을 살았는데 원금은 하나도 못 갚았잖아요. 작품이 잘 팔려도 행복하지 않고 저는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빼앗기니까…. 한동안은 너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어요. 이게 언제 끝날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요. 원금은 한 푼도 못 갚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난 6년간 매달 1000만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는 뜻이잖아요. ‘낸시랭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다독여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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