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시는 20세기 후반 한국 수묵화의 변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송수남(1938~2013)과 황창배(1947~2001)의 회화 작품 84점을 소개합니다.
전시 제목 ‘필묵변혁’은 말 그대로 붓과 먹을 통해 변화를 끌어낸 인물들을 조명한다는 뜻인데요.
송수남은 1980년대 초 ‘수묵화 운동’을 펼친 작가로, 특히 전통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아래 사진 같은 스타일의 산수화를 통해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추상적인 작품으로 변화하는데 이 과정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시 기획자인 임연숙 큐레이터(세종문화회관 문화사업본부장)는 “송수남이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다음 선보일 기회가 없었다”며 “그의 작업 세계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송수남 작고 10주기 등 여러 계기를 맞아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여기에 황창배 작가가 함께하게 된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국화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사실은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한국화를 보여주려는 우리 작가들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의 대표적인 두 작가를 거론하면서 관심을 환기하고 싶었죠.”
황창배는 1980년대 소장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인기 작가였습니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탄탄한 기교를 바탕으로 파격적인 회화를 선보였고, 지금 보아도 ‘현대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작가입니다.
큰 물고기를 화면에 가득 차게 그린 다음 X 표시를 하거나, 요즘 시대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한자 대신 한글로 그림에 글씨를 쓰고, 수묵을 벗어나 아크릴 유화 연탄재 흑연 가루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새로운 시도를 했던 작가입니다. ‘한국화의 이단아’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고, 재기발랄한 캐릭터로 TV 광고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임연숙 본부장은 “현대미술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근택, 이진주 같은 작가들이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이 전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지금은 장르 구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 경계를 깨고 나왔던 시도를 전시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시를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이런 작가들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빨리 잊힌 걸까? 임 본부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황창배 작가는 54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한 것이 안타깝죠. 또 우리 세대는 지필묵을 조금이라도 경험했지만, 요즘은 아예 붓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도 많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시장에서 반짝인기를 끌었다가 거래가 안 되다 보니 조명도 제대로 안 됐죠. 당시 그림을 샀던 컬렉터들이 이제 나이가 들고 세대가 바뀌었으니까요.
다만 시장이 외면한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한국 미술의 흐름에서 갖는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부분을 미술관에서 제대로 연구하고 조명해야 하죠. 이번 전시에서 좀 더 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종이 작품 뒷부분에 조명을 넣고, 큰 전시실은 작업실 느낌이 나도록 바닥에도 놓고 해보았는데, 이런 디테일한 노력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 정보 ‘필묵변혁 - 송수남, 황창배’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 2관 2024년 1월 14일까지
AI, 그래픽, 사운드 … 컴퓨터로 만든 예술
다음 소개할 전시는 완전히 다른 재료로 만든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붓과 물감이 아닌 그래픽 사운드, AI 등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럭스: 시적 해상도’전입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현대미술전시 플랫폼 ‘숨 엑스’와 뽀로로 제작사인 ‘오콘’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12팀의 작품 16점을 볼 수 있습니다.
카오 유시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묵화 이미지의 픽셀 데이터 수만 개를 학습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기술을 활용해 움직이는 산수화를 만들었습니다. 작은 점들이 움직이면서 마치 사계절이 흐르는 듯이 변하는 풍경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카오 유시는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시각 효과 연출을 맡기도 했습니다.
위 작품은 마치 곰 같은 형체가 끊임없이 걸어 나가면서 모양이 바뀌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털이 북슬북슬하다가 금속, 액체, 나무 등으로 계속해서 변화하는데요. 2004년 만들어진 미디어아트, 디자인 콜렉티브인 유니버설 에브리씽은 시네마틱 CGI, 물리학 시뮬레이션, 실시간 게임 그래픽 등을 활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합니다.
이 작품을 함께 감상한 한 현대미술 작가는 기술의 놀라움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런 영상을 실사로 찍으려면 많은 시간과 노동력, 자본이 필요한데 컴퓨터로 이 모든 것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죠. 이를 통해 좀 더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전시 정보 럭스: 시적 해상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12월 31일까지
구독자 의견
🔸당신이 보는 대로 판단하라. 특별한 의미가 없다. 명언입니다. 그냥 벽돌입니다. 👉저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에 작품을 보는 건지, 작품에 얽힌 미술사, 시각 논문을 보는 건지 현대 예술은 정말 알쏭달쏭하네요. 결국 벽돌이 아니라 벽돌을 배치한 작가의 아이디어에 가격을 매긴다는 건지, 이 작품을 해석하는 이런 미술사적 지식과 정보가 만약에라도 사라진다면, 이 벽돌 작품의 가격은 0가 되는 걸까요? 현대 미술은 가끔 사기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거야말로 고급 부조리극 같기도 하고 정말 잘 모르겠어요. 물론 이것 역시 보이는 대로 판단해라라고 하면. 아무튼 늘 생각해볼만한, 재미있는 화두거리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님~) 👉맞습니다. 이 작품을 해석하는 미술사적 지식과 정보가 사라지면 가격은 0이 되겠죠. 그래서 예술 작품은 작가 혼자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사회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가 그것을 받아주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는 이야기죠. 다만 이런 경향의 ‘개념미술’은 20세기 중반에 시대적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이고, 지금은 다시 ‘시각 미술’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즉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하는지가 다시 중요해지고 있거든요. 이 부분도 기회가 되면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흥미로운 의견 감사합니다! ^^
🔸일전에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전시했던 독일 루드비히 미술관 관장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공적인 자금을 운용하는 공공 미술관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현대 작품들을 고가로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개인 컬렉터가 그 부분을 담당하고 공공에게 돌려주는 책임을 맡아야 한다. 내가 작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투기나 투자의 목적이 아니다’ 공공미술관과 개인컬렉터의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해 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트 갤러리의 뚝심있는 행보는 현대미술을 책임감있게 지원하는 개가를 이루었네요. 👉비록 돌을 맞고 주춤했지만, 좋은 작품을 알아본 큐레이터에게 지금은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애호가 있는 사람으로서 도움되는 이번 주 기사 고맙습니다.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은 아주 단순하기에 감상자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 같아서 좋아요. 물론 가끔은 장난하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들도 있지만요. ㅎㅎㅎ (리처드 세라는 좋아하지만 도널드 저드에게는 그닥 호감을 못 느끼는 1인입니다) 👉사실 미니멀리즘 작품은…미술관에서 보기에 가장 재미 없는 작품으로 저도 꼽습니다. 그럼에도 리처드 세라는 규모로 스펙터클한 느낌을 주어서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죠. 너무 공감되는 의견이어서 익명으로 살짝 소개합니다. 의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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