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성북동 켈리타앤컴퍼니에 들어서면 창밖으로 정원이 펼쳐진다. 이 회사 최성희 대표가 오랫동안 정성껏 가꿔온 정원이다. 시각 디자이너 출신으로 광고회사 아트 디렉터를 지냈던 그는 재택근무 개념조차 없던 20여 년 전 자신의 집에서 창업했다. 회사들의 로고 제작과 공간 콘셉트 설정 등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성심당, 백미당, 갤러리아 Gourmet 494, 나인원한남, 서울공예박물관, 조선호텔앤리조트 격물공부, 최근엔 현대백화점 가스트로테이블 등의 BI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음식 공예 공간 등 분야는 달라도 관통하는 ‘켈리타 스타일’이 느껴진다. 손으로 그린 드로잉, 한지와 흙 등 자연 소재, 외길을 걸어온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물이 고급스러운 결을 빚는다. 최근 방문한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계피와 솔방울을 장식한 격물공부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있었다.
그는 브랜딩 작업이 정원을 가꾸는 일과 닮았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제자리에서 자기다울 때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준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든 식물이든 씨앗에 유전정보가 들어있잖아요. 대를 이어 생명력을 갖는 건 자기다움이에요. 지금 저희 정원에는 1000년 전에도 영국에서 자라던 꽃이 살고 있어요. 남의 것을 흉내내지 않고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고유의 본질을 찾아 시각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최 대표는 지난 18년 동안 이맘때쯤 새해 캘린더를 제작해왔다. 자신이 다닌 국내외 도시를 스케치한 캘린더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판매로 이어졌다. 그런데 최근 만든 2024년 캘린더의 주제가 ‘영국 정원’이다.
―왜 영국 정원인가. “영국 시골의 기숙사 학교로 유학 보낸 아들을 챙겨주러 10년 동안 영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동안 자주 시간을 보낸 장소가 영국 정원이었다. 그동안 영국 정원에서 느꼈던 위로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다녔던 정원 중 12곳을 골라 그렸다. 정원에는 열두 계절이 있다. 지난 18년 동안은 도시여행을 다뤘는데 이제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통해 힐링의 시간을 나누고 싶다.”
―영국 정원이 준 위로는. “2016년 가을 혼자서 위즐리 정원을 방문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그라스를 보고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한참 신나게 걷다가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을 줍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 손바닥을 닮은 낙엽들을 보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메마른 손이 떠올라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그해 봄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위즐리 정원의 오래된 나무들 사이에 앉아 꾹 참고 있던 큰 슬픔을 내어놓고 위로를 받은 것 같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 날의 기억을 2024년 캘린더 11월 스케치에 담았다.”
―영국 정원의 매력은. “영국 정원에는 계절을 꽃 피우는 아름다운 식물과 오래된 건축물뿐 아니라 정원사가 심어놓은 저마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떠나 시간 여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로 런던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생각하지 못했던 낯선 동네를 여행하는 묘미도 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그의 주택 정원을 거닐다 보면 진짜 가드너의 정원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계절마다 씨앗을 모으고 압화도 배운다. 최 대표는 몇 년 전만 해도 시든 꽃을 잘라내던 일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자연에 순응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껴주는 일,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날 양질의 흙을 만드는 일에 요즘 관심을 쏟는다. 그는 가드너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순응’을 꼽는다. 해시계에 일상의 리듬을 맞춰야 한다고 한다.
―20여 년 가꾼 정원에 오랜 영국 정원 투어가 미친 영향은. “처음엔 화려한 꽃들을 보고 이름을 외우고 씨앗도 샀다. 그러다 도구들도 모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흙이 보였다. 잘 설계된 퇴비 통에서 낙엽 등을 제대로 발효시켜 만들어 사용하는 까만 부엽토는 정말로 촉촉하다.”
아들은 가는 정원에서마다 씨앗을 사는 엄마를 ‘씨만 사 여사’로 불렀다고 한다. 서머셋 지역의 시골 정원에 방문했을 때에는 인근 골동품 가게에서 커다란 삽도 샀다. 서울로 돌아올 때 그 삽을 애지중지 포장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이 “엄마, 저는 삽을 들고 비행기 타는 여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다고. “그냥 기타라고 생각해”라며 들고 온 그 삽은 지금 성북동 켈리타 정원에서 잘 사용되고 있다. 그 사이 아들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가드닝과 자녀 교육의 닮은 점이 있나. “무엇을 좋아하는지 본성을 잘 살펴 관찰하고 마음껏 자랄 수 있는 토양과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기다리고 바라보고 기도하며 있는 그대로 예뻐해 주는 게 식물에게도 자녀에게도 필요한 것 같다.”
―영국 정원에서 배운 삶의 자세는. “눈 부신 햇살도 아름답지만 뿌연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정원의 식물은 빛이 바래더라도 아름답다.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하는지 정원이 가르쳐준다. 정원을 갖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삶은 밝을 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밝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최 대표가 2024년 캘린더에 담은 영국 정원들〉
1월 그레이트 딕스터 정원 (Great Dixter House & Gardens)
위대한 정원사이자 가든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숨결이 살아있는 정원. ‘그레이트 딕스터’라는 이름의 가옥과 함께 과감한 볼륨과 강렬한 색으로 정원이 구성됐다. 어머니의 사랑이 이어지는 토피어리(topiary·장식적으로 자른 나무)와 초원의 메도 정원(meadow garden), 식물과 종자를 판매하는 너서리(nursery)까지 방문할 때마다 해가 지도록 볼거리와 배울 거리가 넘친다.
2월 시싱허스트 캐슬 정원 (Sissinghurst Castle Garden)
계절마다 다채로운 색상을 자랑하는 비타 색빌웨스트의 정원. 일찌감치 도착해서 스콘과 티 한잔으로 시작하면 지치지 않고 돌아볼 수 있다. 중세 분위기의 붉은 벽돌 타워를 지나며 벽으로 나누어진 정원구성이 흥미를 더한다.
3월 러샴 정원 (Rousham House & Gardens)
지형과 경사를 이용한 호수와 건축물로 곳곳에 장관이 펼쳐진다. 회화를 공부한 건축가이자 정원사였던 윌리엄 켄트의 초기 디자인이 잘 보존된 풍경 정원이다. 사과나무 배나무 포도나무 등이 회화적 이미지를 더하고 큰 숲과 물길이 흐르는 산책로가 교차된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드라마틱하다.
4월 옥스퍼드 보타닉가든 (Oxford Botanic Garden)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보타닉가든인 옥스퍼드 대학 식물원은 1621년 약용식물 연구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마들린 타워를 바라보며 50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을 관찰할 수 있고 처웰강에서 나룻배를 즐기는 풍경도 운치 있다.
5월 첼시 플라워쇼 (Chelsea Flower Show)
영국의 왕립원예협회(RHS·Royal Horticulture Society)에서 주관하는 세계적인 원예 축제로 매년 5월 말 첼시 지역의 왕립병원 정원에서 열린다. 정원디자인 트렌드를 볼 수 있고 다양한 식물과 정원용품도 살 수 있어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6월 왕립식물원, 큐가든 (Kew Gardens)
정원이라기보다 공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규모와 방대한 식물 데이터를 갖춘 세계적 기관이다. 2024년 캘린더에는 큐가든의 상징인 대온실과 큐가든 설계에 참여했던 윌리엄 체임버스의 중국탑을 그렸다. 하루에 다 돌아보려는 마음을 비우고 방문할 때마다 수련 온실 등 몇 가지를 정해 천천히 즐긴다.
7월 앤 해서웨이 코티지 (Anne Hathaway’s Cottage)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 해서웨이가 나고 자란 시골집과 사랑스러운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돌아가 꽃과 채소가 어우러진 코티지 가든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8월 도브 코티지(Dove Cottage Garden by William Wordsworth & Dorothy)
영국의 대표적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동생 도로시가 살았던 코티지 정원. 곳곳에 놓여있는 돌에 새겨진 워즈워스의 시와 식물들을 함께 감상하고 차분히 동네 풍경을 즐길 수 있다.
9월 하우저앤드워스 소머셋 정원(Oudolf field at Hauser & Wirth Somerset)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는 영국 서머셋의 작은 시골 마을 브루턴의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에 자연주의 정원을 조성했다. 2만6000여 종의 다년생 초화들은 꽃피는 봄부터 메마른 겨울 정원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계절의 순환을 포용한다.
10월 더 피그 (The Pig near Bath)
더 피그는 영국 시골 곳곳에 자리 잡은 키친가든 중심의 작은 호텔이다. 가는 곳마다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 가든 리스트에 넣었다. 허수아비가 있는 텃밭에서 키워진 신선한 계절 채소들은 인근 25마일 내의 농부와 어부들이 제공하는 로컬 식재료들과 어우러져 사랑스럽고 행복한 식탁을 이룬다.
11월 위즐리 정원 (RHS Garden Wisley)
영국 왕립원예학회원가 운영하는 방대한 정원으로 가드너들이 꿈꾸는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가든샵 구성도 좋아 식물 마니아들의 성지다. 1879년 오크우드의 실험정원으로 시작된 정원답게 오크 낙엽들이 가을 정원의 운치를 더한다. 알파인 하우스(Alpine House)에서는 고산식물을 볼 수 있고, 암석정원(Rock Garden)과 온실에는 싱그러운 에너지가 가득하다. 컨디션 좋은 날 하루종일 일정을 비우고 가는 걸 추천한다.
12월 리틀 스파르타 (Little Sparta by Ian Hamilton Finlay)
스코틀랜드 목초지 한복판에 위치한 프라이빗 정원. 가드너이자 시인이었던 이안 해밀턴 핀레이(1925~2006)의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바람 부는 대지에 툭툭 놓인 돌조각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노래한다. 그 사이를 걸으면 문학과 예술이 만난 핀레이의 기이하고 시적인 정원에 푹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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