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물리학상 수상 조르조 파리시
“엄청난 생각, 하루에 떠오르지 않아
실패후 잠복기-증명 등 4단계 거쳐야
한국 급성장, 과학 투자했기에 가능”
“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면 이후로도 그 분야를 계속 고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일찍 성공했더라면 오로지 입자물리학만 공부하고 다른 분야는 공부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복잡계(complex system)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기회도 없었겠죠.”
20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물리학자 조르조 파리시(75)는 17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시의 에세이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사이언스북스·사진)는 지난달 15일 국내에 출간됐다.
1973년 스위스 제네바. 당시 25세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던 파리시는 네덜란드 물리학자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당시 27세)와 아침 식사를 하며 “정말 대단한 성과를 거두셨다. 이 연구 결과를 다른 이론에 사용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 했다. 엇호프트가 분석한 쿼크(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 관련 연구를 확장해보자는 가벼운 제안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머리를 맞댔지만 쉽지 않다고 보고 포기했다. 하지만 얼마 뒤 미국 물리학자들이 엇호프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양자색소역학’ 이론을 만들어냈다. 파리시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30분만 더 투자했으면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물리학자들은 이 이론으로 200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파리시는 찌르레기 무리의 비행에서 복잡계 과학의 핵심 원리를 발견하는 등 물리학적 체계에서 무질서와 변동의 상호작용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마침내 노벨상을 받았다. 파리시는 인터뷰에서 “1973년 그날 오후, 우리는 노벨상을 받을 기회를 잃고 말았지만 어떤 면에선 젊은 시절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때가 유일한 기회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신간에서 ‘미시적 창의력’을 강조한다. 일상에서 떠오른 작은 아이디어를 시간을 갖고 조금씩 발전시키면 큰 발견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 연구의 시작-실패 후 잠복기-깨달음의 순간-수학적 증명이란 4단계를 긴 인내심을 갖고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매일 문제를 들여다보고,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면 질문에 다르게 접근할 수 있어요. 열려 있는 사고와 이해력을 갖고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신간에서 가난했던 한국이 빠르게 성장한 건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국가가 부(富), 번영, 국민의 생활 수준 향상을 꾀한다면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은 잘 이해하고 있다”며 “한국에는 매우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다. 앞으로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올 7월 다른 과학자 99명과 ‘기후 위기를 단순한 악천후로 축소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사회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해 9월 유럽에 에너지 공급 부족이 심해지자 “파스타를 만들 때 끓는 물에 면을 넣고 끓을 때까지 다시 가열한 뒤 냄비 뚜껑을 덮고 가스 불을 끄거나 최소한으로 줄이라”며 연료를 절약하는 법을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됐다. 그는 2021년 “이탈리아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개발 투자가 부족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뒤 사회적 문제가 있으면 개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대중이 과학을 이해하는 건 민주주의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선 전염병 확산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기후 변화 관련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선 과학적으로 기후 변화 원인에 대해 이해해야 해요.”
그는 “아직도 세상엔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적 현상이 많다”며 “그것들을 언젠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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