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서 회고전
‘자화상’부터 ‘콘크리트 광화문’까지
작품 500여점-자료 600여점 소개
성공한 작가의 색다른 면모 눈길
밧줄로 칭칭 감은 얼굴을 한 남자의 몸을 담은 사진, 표면엔 긁힌 자국이 가득하다. 1988년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시좌(視座)’전에 사진가 구본창(70·사진)이 출품한 이 작품은 ‘탈의기’. 해변에 뒹굴던 밧줄 꾸러미는 나를 옭아매는 틀로, 그리고 그 틀을 벗어나 변화하려는 몸부림을 표현했다.
작가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직접 퍼포먼스를 하며 필름을 긁거나, 두 개의 필름을 겹쳐 콜라주를 하고, 사진용 물감을 이용해 색을 입힌 뒤 합친 필름을 다시 인화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이 사진들은 ‘연출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지금은 한국 현대사진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구본창의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가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 지금의 구본창 만든 초기작 눈길
이번 전시는 구본창의 첫 작업인 ‘자화상’(1968년)부터 미발표작인 ‘콘크리트 광화문’(2010년) 연작까지 작품 500여 점과 관련 자료·수집품 600여 점을 소개하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유명인 초상 사진이나 패션 화보, 달항아리·비누 시리즈 등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알려진 구본창의 색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전시의 시작은 독특하게도 구본창의 작품이 아닌 그의 수집품이다. ‘호기심의 방’이란 주제로 구성된 첫 전시장에서는 그가 모은 책, 포스터 등 다양한 오브제를 소개한다.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구본창 작가는 좋은 학교를 나오고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꼈고, 이 때문에 버려진 것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며 “이런 마음에서 우러난 ‘수집벽’에서 작품이 출발했음을 보여주고자 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다음 ‘모험의 여정’ 주제로 넘어가면 작가가 독일 유학을 다녀올 무렵 초기작이 소개된다. 유학 시절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모아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기록한 ‘초기 유럽’ 시리즈, 이방인으로 느낀 소외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담은 ‘일 분간의 독백’ 등이 펼쳐진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막막함을 즉석 필름 카메라로 담아 사진계 안팎에 큰 인상을 남긴 ‘열두 번의 한숨’도 볼 수 있다. 한 학예연구사는 “유명 작품 말고도 구본창 작가가 그간 부지런히 다양한 작업을 해왔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 달항아리 등 대표작, 제작 맥락 담아
구본창의 잘 알려진 작품들도 전시장에서 물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임종을 기록한 ‘숨’ 시리즈는 ‘하나의 세계’ 섹션에서,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담은 ‘문 라이징 III’은 ‘영혼의 사원’ 섹션에서 각각 소개된다. ‘문 라이징 III’은 세계 곳곳에 소장된 백자 달항아리 12개를 촬영한 작품으로, 마치 달이 뜨고 지는 듯한 광경이 연출된다.
무속 신앙과 불교에서 사용된 종이꽃을 담은 ‘지화’, 야외에 놓인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를 촬영한 ‘콘크리트 광화문’ 시리즈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잘 알려진 시리즈에 대해서는 작가가 어떻게 처음으로 그것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충실히 담아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장 벽면에는 작가의 생애, 작품 제작 계기, 전시 개최 배경 등을 상세하게 정리한 연보가 있다. 내년 3월 10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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