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떴던 연말이 지나고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시작됐다. 연말 분위기에 마음을 아직 채 가라앉히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세계 유명 영화제를 사로잡았던 영화 두 편이 연달아 개봉한다. 지난해 제76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개막작이었던 ‘클레오의 세계’와 2022년 제79회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노 베어스(NO BEARS)’다. 잔잔하고 묵직한 영화로 차분하게 한 해를 시작하기에 좋을 것 같다.
3일 개봉한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유년 시절과 성장통이라는 아주 개인적인 경험을 스크린 위에 아름답게 풀어냈다. 여섯 살 클레오의 세계는 온통 유모 글로리아로 가득 차 있다. 엄마를 암으로 잃은 클레오에게 글로리아는 다정하고, 따뜻하고, 폭신한 엄마 그 자체다. 하지만 글로리아가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되면서 클레오는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결국 아빠는 여름방학 동안 클레오를 글로리아에게 보내준다. 영화는 클레오가 글로리아의 집에서 보낸 여름을 아름답게 담았다. 끈적끈적한 바닷바람과 여름 냄새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자신의 세계엔 글로리아뿐이었지만, 글로리아에게는 그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어린 클레오가 차츰 깨닫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누구나 어린 시절 소중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라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0일 개봉하는 영화 ‘노 베어스’는 이란의 억압적인 현실을 묵직하게 까발린다. ‘노 베어스’는 세계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칸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이란 영화계의 거장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작품이다. 파나히 감독은 2009년 반정부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징역 6년 형과 함께 출국·영화 제작·언론 인터뷰 금지 처분을 받고 가택연금됐다. 하지만 계속해서 비밀리에 영화를 찍었다.
‘노 베어스’는 자유를 빼앗긴 파나히 감독 자신이 주인공이다. 영화 속에서 파나히 감독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 이란과 튀르키예의 국경 시골 마을로 피신한다. 제작진은 이란을 떠나려는 커플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있고, 그는 방에 앉아 영상통화로 감독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자주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는 관계로 촬영이 지연된다.
시골 마을에서도 그를 둘러싼 소동이 벌어진다. 이미 정혼자가 있던 여성이 다른 청년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그의 카메라에 찍혔다는 소문이 퍼진다. 마을 원로들은 그의 집에 쫓아가 사진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현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정혼자 문화부터 찍으면 안 될 것을 찍었다는 설정까지 파나히 감독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은유다. 파나히 감독은 자유를 억압하고 미래를 앗아가는 이란 정부에 대한 풍자를 영화 속에 켜켜이 쌓아 놓았다. 그는 이 영화를 찍은 직후인 2022년 7월 체포됐고, 구금된 상태에서 그해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이후 옥중 단식 투쟁을 하다가 지난해 2월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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