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한국역사연구회-역사공장 ‘여성 독립운동가’ 시리즈 완간
호미 들고… 경찰서 몰려가 시위
전남 ‘도초도 소작쟁의’ 등 소개
임시정부 女광복군 활약도 조명
‘늙은 부인들은 발을 구르며 남자들의 기개가 부족함을 통매(痛罵·몹시 꾸짖음)했다. 이들은 “일제히 광주로 가서 매 맞고 굶어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일하다 철창에서 신음하는 동지와 같이 하자”고 말했다.’
1925년 10월 23일자 동아일보 5면에 실린 전남 무안군 도초도(현 신안군 도초도) 소작쟁의 사건 기사 중 일부다.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이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올려 섬 주민들이 반발하자, 일제는 주동자 20여 명을 체포하는 등 강제 진압에 나섰다. 이에 도초도 주민 200여 명이 나룻배를 타고 목포경찰서까지 몰려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찍힌 시위대 사진에서 맨 앞줄에 앉은 이들은 모두 한복 치마를 입은 중년 여성들이다. 이들은 광주형무소에도 주민들이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주로 이동해 시위를 계속하자”며 강하게 맞섰다. 시위대 해산 과정에서 부상자가 여럿 발생했는데, 이 중 병원 치료를 받은 중상자 명단에는 ‘김성녀(金姓女·김씨 성을 가진 여성)’ ‘김소사(金召史·김씨 성의 과부)’ 등 이름 없는 50, 60대 여성 3명이 포함돼 있다. 백정 해방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봉건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던 1920년대에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기준 국가보훈부의 국내 항일운동 서훈자 3060명 중 농민 여성은 2명에 불과하지만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았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독립기념관과 한국역사연구회, 역사공장이 공동 발간한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 시리즈(전 5권·사진)가 최근 완간됐다. 독립기념관은 2019년 ‘3·1운동에 앞장선 여성들’을 시작으로 항일 무장투쟁, 국내 사회운동, 국외 한인사회, 여성단체를 주제로 한 단행본을 매년 한 권씩 펴냈다. 공동 저자 13명이 집필한 다섯 권을 통틀어 총 100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등장한다.
여성들의 항일운동은 뭍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1년 12월∼1932년 1월 제주도 내 어촌마을 6곳의 해녀 약 1만7000명도 공동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의 어업령에 따라 설립된 해녀조합에서 감태와 전복 값을 강제로 내린 데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일경에 맞서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주동자를 체포하러 온 배를 에워싸며 시위를 벌였다. 이 중 100여 명이 일제에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제주 해녀들의 집단행동은 최대 규모의 항일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항쟁을 주도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세 해녀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시리즈 전반을 기획한 이지원 대림대 교수(한국근현대사)는 “독립운동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거나 일제의 재판 기록으로 확인된 여성 독립운동가 자료는 남성보다 적다”며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지원한 경우 ‘사적 영역’으로 취급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리즈에선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딸로만 여겨졌던 여성 광복군의 활약상도 새롭게 조명됐다. 예를 들어 지복영은 교과서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딸로만 간략히 언급돼 있지만 그는 여군으로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16세에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만주로 온 오희영은 지복영과 함께 적진 부근에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한승훈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정부가 훈장을 수여한 여성 광복군은 30여 명이지만 증언 등을 토대로 보면 100여 명의 여성이 광복군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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