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공원에서 사카모토 류이치를 떠올리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7일 07시 50분


오늘 오후 서울에는 눈이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시간을 낼수 있다면 선유도 공원에 가 보는 것을 추천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서울 영등포구 선유도공원에 눈이 내린 모습. 김선미 기자

희미한 어둠 속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흑백의 건반을 비추는 동그란 조명이 보름달 같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기 전,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란 자서전을 남겼던 걸까.

지난달 국내 개봉한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세계적 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1952∼2023)가 암 투병 중이던 2022년 9월에 촬영됐다(일찍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왔기에 그의 이름은 영어식으로 ‘류이치 사카모토’로 통하고 있다). 세상과 작별을 예감한 사카모토는 평생 만들어왔던 음악 중 20곡을 일주일의 촬영 동안 연주했다. 그 숭고한 모습을 아들 네오 소라 감독이 담았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서 고인은 한 손으로는 지휘를 하며 연주를 했다. 삶을 향한 지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서 고인은 한 손으로는 지휘를 하며 연주를 했다. 삶을 향한 지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엣나인필름 제공

사카모토가 그랜드 피아노 위에 펼치고 연주하는 순백(純白)의 악보를 보다가 어느 겨울 정원의 풍경이 떠올랐다. 눈 오는 날의 선유도공원이다. 서울 양화대교 중간에 있는 선유도공원은 옛 정수장을 재활용해 조성한 국내 최초의 환경 재생 생태공원이다. 한국에 몇 차례 왔던 사카모토가 선유도공원을 가 봤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영화 속 카메라가 천천히 비추는 피아노의 건반과 페달, 몸체와 의자는 자꾸만 선유도공원의 건축구조물을 기억 속에서 오버랩 시킨다.

피아노 다리를 연상시키는 선유도공원의 건축구조물. 김선미 기자

조성룡 건축가와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아 2002년 태어난 선유도공원은 과거 선유정수장이었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의 오염된 한강 물을 식수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기능이 끝나 폐쇄된 이 정수장을 도시재생을 통해 공원으로 바꾸면서 옛 건물을 남겨둔 건 ‘신의 한 수’였다. 폐허의 흔적을 여름에는 녹색 덩굴식물이, 겨울에는 흰 눈이 풍성하게 덮는다.

뜻밖에 눈이 많이 오던 휴일에 들러본 선유도공원은 인적이 거의 없었다. 나만의 설국(雪國)이었다. 과거 정수장이었던 이 ‘물의 공원’은 겨울에는 눈의 공원이 된다. 나무들이 눈 속에 심어진 것 같다. 눈을 맞은 화살나무의 줄기는 화살촉 형상이 그 어느 계절보다 선명했다. 줄기가 새빨간 흰말채나무는 눈 위에 피운 모닥불꽃이었다.

식물이 눈과 얼음 속에 심어진 듯한 선유도공원의 겨울 풍경. 김선미 기자

선유도공원에서 왜 사카모토의 피아노가 떠올랐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아하’ 싶었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오르내리는 사카모토의 구도(求道)적 손놀림이 선유도공원에 있는 ‘시간의 정원’을 연상시킨 것이다. 눈 덮인 시간의 정원 계단은 피아노 흰 건반 같았다. 부서질 뻔한 옛 정수장 건물은 그 자체로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인 셈이었다. 한 계단 오르면 ‘도’, 세 계단 오르면 ‘미’. 그렇게 폴짝폴짝 오르내리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 쌓인 선유도공원의 계단에서 피아노 계단을 떠올렸다. 김선미 기자

삶을 다하기 전 70세의 피아니스트는 길지만 투박한 손가락으로 섬세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스무 곡을 연주하는 영화에서 그의 대사는 이것뿐이다. “다시 합시다”, “잠시 쉬고 하죠. 힘드네. 무지 애쓰고 있거든.” 거장도 힘들 때, 틀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연주를 멈추고 몇 번이고 연습한 뒤 다시 시작했다. 감독인 아들은 그런 순간들을 삭제하지 않고 영화에 그대로 담았다. 사카모토는 종종 왼손으로 건반을 누르면서 오른손으로 지휘를 하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새의 날갯짓 같았다.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고 자신을 향해, 또 우리에게 말하는듯한 섬세한 위로였다.

물방울을 가지에 품고 있는 선유도공원의 겨울 나무. 김선미 기자

사카모토의 음악과 선유도공원은 풍화의 세월을 겪은 숭고미를 갖고 있다는 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점이 닮았다. 선유도공원 조경을 맡은 정영선 조경가는 말했었다. “용도 폐기된 정수시설을 부숴버리면 그 시절의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옛것과 새것을 연결했다. 선유도공원은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했다.”

옛 정수장이었던 선유도공원에 눈이 내린 모습. 김선미 기자

영화 ‘오퍼스’에서 사카모토는 ‘20180219’란 제목의 곡을 연주한다. 2018년 2월19일 만들어 연주한 곡일 것이다. 그는 피아노 현 위에 집게와 나사 등을 꽂은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현이나 해머에 이물을 장치해 음을 변질시킨 피아노)로 2분음표 길이의 화음들을 연주했다. 현대 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가 완성했던 프리페어드 피아노의 전자음악 소리였다. 소음과 정적도 아우르는 음악, 기존 고정관념을 뒤엎는 음악….

정수장 폐허를 거친 풍경으로 활용한 선유도공원도 ‘공원은 말끔해야 한다’는 기존 문법을 뒤엎었기 때문에 긴 생명력을 갖는 게 아닐까. 옛 정수장 건물은 날실과 씨실처럼 땅 위에서 직조(織造)된다. 쓸모가 다한 산업시설을 공원으로 부활시키는 발상의 전환은 제2, 제3의 선유도공원을 낳았다. 정수장을 활용한 서울숲(2005년 개장)과 서서울호수공원(2009년 개장), 철도 폐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2012년 개장)…. 선유도공원에 서면, 특히 눈 오는 선유도공원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폐허의 미학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사계절 생명력을 보여주는 선유도공원. 김선미 기자

사카모토는 평화로운 일상을 일순간에 폐허로 만드는 일본의 쓰나미와 지진을 자주 겪었다. 하지만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다. 그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 이렇게 썼다.

‘쓰나미로 인해 흙탕물을 뒤집어쓴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며 귀를 기울여보니 완전히 흐트러진 조율의 현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취 있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피아노라는 것은 원래 목재라는 물질을 자연에서 가져와 철로 연결해 우리가 선호하는 소리를 연주하도록 만든 인공물이잖아요. 그러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나미라는 자연의 힘에 인간의 에고(ego·자아)가 파괴되어, 비로소 자연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생전에 산림보전에 힘쓴 사카모토의 뒷모습. 모어트리즈 인스타그램

그는 환경과 생태보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삼림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를 설립해 나무 기부 활동을 벌이고, 점차 사용량이 줄어드는 원목을 활용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모어 트리즈 홈페이지에는 사카모토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이 있다. ‘인간은 항상 숲과 공존해 왔습니다. 하지만 숲이 무너지면 문명도 무너집니다. 우리는 미래세대를 위해 소중한 숲을 물려줘야 합니다.’ 그는 동일본대지진 피해 지역 어린이들을 모아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도 창립했다. 커다란 마음의 폐허를 음악으로 위로했다.

영화 ‘오퍼스’는 발자국 소리로 마무리된다. 사카모토가 또 다른 세상으로 걸어가는 소리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생전의 그는 완성된 영화 편집본을 보고 “좋은 작품이 되었다”고 했다고 한다. 살아온 날들을 피아노 연주로 마무리하며 만족스럽게 세상과 작별하는 것. 이 얼마나 멋지고 부러운 작별인가.

선유도공원에 놓여있는 피아노. 누구나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야외에 두었다. 김선미 기자

선유도공원에도 피아노가 있다.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는 아니어도 누구나 연주할 수 있게 야외에 둔 갈색의 업라이트 피아노다. 시간이라는 악보를 연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그 피아노를 보면서 마음속에 ‘상상의 풍경’을 그린다. 사카모토가 겨울의 선유도공원에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를 연주하는 모습을,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와 그의 숨소리와 건반 소리가 어우러지는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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