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끼리 연대로… 멸망 후를 살아가기[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7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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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종말 문학 서사에서 나아가
생존 조건으로서 휴머니즘 다뤄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예소연 지음/224쪽·1만5000원·허블

정보라 소설가
정보라 소설가
‘3차 세계대전’으로 멸망한 세상에서 세 명의 노년 여성 용병이 생존의 터전을 찾아 나선다. 지구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지역과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풍요롭고 안전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용병들은 ‘워커’라는 이름이 붙은 일종의 최하층 계급으로, 인간이 아닌 전쟁 무기나 도구 취급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노년 여성인 창, 아샤, 말리는 워커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푸대접을 받는 신세다. 젊고 힘센 다른 용병들은 이 노년 여성인 창과 아샤, 말리를 깔보고 욕하고 성추행하려 든다. 세 명의 여성은 공격하는 자들의 손목을 꺾거나 성추행범의 몸에 끓는 수프를 부어 버리고 워커들의 커뮤니티에서 도망친다. 이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 다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 중심적인 폭력의 질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 인간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 세 명의 여성을 안내하는 존재들은 로봇이다. 고양이 로봇인 ‘치즈’가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무리를 지어 고양이 로봇 군단으로 등장하는 모습이나 본래 워커들을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두더지 로봇이 불평을 하는 장면은 무척 귀엽다. 동물들은 인대가 망가진 창의 발목을 수술해주고 돌봐주며 함께 생존의 땅을 찾아 떠난다.

창과 말리, 아샤는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세상, 풍요와 평화를 당연하게 여겼던 시대는 등장인물들에게는 과거지만 독자들은 지금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끊임없는 갖가지 위협에 당면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미래 세계가 현재와 계속해서 대비되며 독자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기후 위기, 자원의 소멸,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무력 충돌과 전투…. 지금 작품 바깥의 현실이 작가가 그려낸 장편소설 속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작가는 파멸의 미래를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작품의 중심은 연대와 생존이다.

지구 멸망이나 인류 종말을 소재로 한 ‘종말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장르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최소한 100년 이상 된다. 영국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1866∼1946)는 소설 ‘타임머신’(1895년)에서 수십억 년의 시간이 흘러 인류가 자연적으로 멸종한 세계를 묘사하며 이를 필연적인 결말로 받아들인다. 21세기도 이제 24년째에 들어선 지금, 멸망과 위기를 겪고 생존한 사람들이 다시 삶을 일으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익숙한 장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간의 폭력과 잔인함, 존엄성과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나아가 인간성이란 파괴와 생존 중 어느 쪽인지를 질문한다.

이에 비해 작가는 인간성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요건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생존의 요건은 신체적 완력이 아니라 정신적 강인함, 약자들의 저항과 연대다. 인간이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존이다.

#종말 문학#멸망 후#생존 조건#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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