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인장포 하는 사람들은 5·16 이후에 다 지방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회사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근방이 다 회사였어요. 옛날에는 관공서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인장이 300~400종에 달했어요. 그래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인장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인쇄 기술자보다 인장 기술자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년생, 거인당) 인터뷰 |
“1964년에 을지로5가에 있는 인쇄 가게 문 앞에 책상 하나 빌려서 독립을 했어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가게에 책상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조각사가 한 5~6명 있었어요.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도장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 재료만 취급했죠.“ 박순옥(남, 1930년생, 영광인재사) 인터뷰 |
“내가 인장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동 58번지였어요. 거기서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공단 한일은행 바로 옆에 있다가 군대 갔다 와서 1977년에 대일사를 개업했어요. 거기서 2년 있다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이 있는 중앙빌딩으로 옮겼죠. 1980년에 여의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년생, 한국인장협회 회장) 인터뷰 |
“지금 영풍문고 짓기 전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중 하나를 보증금 50만 원에 얻었어요. 공간은 한 평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차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년 반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보증금 50만 원에 위로비 150만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만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년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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