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의 영화에선 익숙한 한시가 색다른 울림을 빚어낸다. ‘춘몽’(2016년)에서 고향 연변을 떠나 아빠를 찾아 한국에 온 예리는 식물인간이 된 아빠 병 수발에 차츰 지쳐간다. 예리는 달 밝은 밤 고향주막에서 당나라 이백의 시를 읊는다.
시인은 침상 앞을 비추는 달빛을 땅 위에 내린 서리인 줄 알았다. 이내 머리를 들어 밝은 달을 확인하곤 고향 생각이 나 고개를 떨군다. 달빛이 마음을 움직여 그리움이 더 간절해진 것일까. 어떤 수식도 없이 소박하게 표현된 20글자의 여운이 짙다. 고향을 그리는 그 어떤 시보다도 더 진솔하다. 달빛을 서리 같다고 비유한 것은 남조(南朝)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와 초당(初唐) 시기 장약허(張若虛)의 시에서 연유한 것이다(‘玄圃納涼’과 ‘春江花月夜’).
영화에서 예리가 운영하는 고향주막의 단골은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떠도는 세 남자다. 탈북자 정범, 고아 익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종빈. 이 삼총사는 예리에게 기대 각자의 결핍을 채운다. 예리가 이 시를 읊고 설명해주자 익준은 시가 너무 간단해서 자신도 쓸 수 있겠다고 말한다.
단순해 보이는 시지만 달빛을 실내나 실외 중 어디에서 본 것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실내에서 봤다면 땅 위에 서리 내린 것처럼 보인다는 말과 맞지 않기 때문에 실외에서 본 것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또 두 번 반복되는 ‘명월(明月·밝은 달)’ 중 하나는 이백의 시집엔 ‘산월(山月·산에 뜬 달)’로 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달을 보았든 밤에 잠 못 이루고 달빛을 바라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친 것만큼은 분명하다.
장률 감독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 ‘당시’(2003년)에서도 이 시를 인용했다. ‘춘몽’에서 예리와 삼총사가 함께 본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감독은 당시를 좋아하고 엄격한 예술적 틀 속에서도 자유를 추구한 이백을 특히 더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다(정성일과의 대담). ‘당시’에서 ‘고요한 밤의 향수’가 낭송될 때 지난 삶을 후회하는 전직 소매치기는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한다.
‘춘몽’에서 예리는 정범에게 북한이 싫어서 왔는데 이제 이곳을 더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정범은 북한에 두고 온 병든 여동생을 잊지 못하지만, 북도 남도 그에겐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예리 역시 고향 연변을 그리워하지만 차마 아빠를 버리고 돌아갈 순 없다. 북한이나 연변에 가보고 싶다는 종빈에게 익준은 여기가 고향이라고 타박을 준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단한 삶 속에서 각자의 그리움으로 떠돈다. 이백의 ‘고요한 밤의 향수’가 일장춘몽 같은 인생 속에서 새롭게 발화(發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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