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마음속 빛나는 인연 하나쯤[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3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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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인연’과 꼭 닮아있는
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
◇인연/피천득 지음/300쪽·1만5000원·민음사

이호재 기자
이호재 기자
미국 뉴욕의 한 공원. 파란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해성(유태오)이 홀로 서 있다. 해성은 어색한 듯 두 손을 만지작거린다.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자꾸 머리를 매만진다. 해성의 얼굴엔 걱정이 묻어 있다.

“해성!” 흰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은 나영(그레타 리)의 부름에 해성이 돌아본다. 나영이 천천히 걸어와 해성 앞에 선다. “와. 너다” 나영이 감탄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본다. 24년 전 두 사람이 한국에서 함께 놀던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5초 나온다. 동일 장소, 동일 시간에 존재했던 기억을 떠올린 덕일까. 어색함은 서서히 사라진다. 현재로 돌아온 둘은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며 껴안는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을 보며 수필집 ‘인연’의 책장을 열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에 간 일이 있다.”

표제작인 수필 ‘인연’에서 피천득 시인(1910∼2007)은 17세 봄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 하숙집에서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일본 여성 아사코를 만난 기억을 털어놓는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지닌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따랐다. 피천득이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피천득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췄을 정도였다. 10여 년이 지나 두 사람은 재회한다. 아사코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으로 커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두 사람은 산책하며 끌림을 느꼈지만 끝내 이어지진 않았다.

다시 10여 년이 지났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겪은 뒤였다. 어떤 일들을 겪은 것인지 결혼한 아사코의 얼굴은 시들어 있었다. 피천득은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악수 없이 절한 뒤 헤어진다. 피천득은 복잡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쓰며 글을 끝맺는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해성과 나영이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준다는 점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와 ‘인연’은 유사하다. 셀린 송과 피천득이 자신이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치 한 편의 연애소설처럼 솔직하게 펼쳐냈다는 점도 비슷하다.

피천득은 수필집에서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수필 ‘신춘’ 중),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는 것”(수필 ‘장수’ 중)이라고 말한다. 셀린 송은 영화계 최고 권위의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뒤 “(인연은) 기적적인 연결”이라고 했다. 셀린 송이 피천득의 수필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이 인연에 대해 갖는 생각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인연#피천득#패스트 라이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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