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술 속성 교수 |
실지 통신 속성 강습 중에는 사진기 무료대부하는 특전이 있어 실습의 편리를 줌. 본원 졸업생으로 각지에서 단독개업자 오십여명인 데 모두 상당한 수익을 득하며 방금 강습생도 십여 명이 있어 나날이 발전의 영역에 도달하오니 제위는 주저치 말고 지금 속히 신입하여 만시지탄이 없게 하심을 희망함. |
[最初로寫眞박힌 京城市街全圖 – 성곽이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 있고 초가와 양옥집은 별로 없다 “조선에 사진술이 들어오기는 대개 사십년 전, 1888년 경인 듯 하다는데 수입되던 당시에는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한편으로 무식한 사람들은 사진을 박히면 생면을 뺏어 간다하여, ‘렌즈’를 보면 도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풍경사진도 마음대로 박지 못하였으므로 경성 시가의 사진도 부분적으로 박은 것은 있으나 전체 경성 시내의 사진을 볼 수 없었는데 경성부 부사편찬계에서는 최근에 모 일본인의 집으로부터 당시에 비밀리에 박아 두었던 경성 전경 사진을 구해 보관 중인데, 사진은 왜성대(倭城臺) 부근에서 박은 것인 듯하다하며 아직 성곽(城郭)이 튼튼히 남아 있고 지금과 같은 양옥도 보이지 않아 연대는 대략 35년 전으로 경성을 사진으로 박은 것은 이것이 최초인 듯하다 한다(사진은 35년 전의 대경성) |
화학원 안에 여자 사진부 설립 – 이는 여자에게 적당한 직업 |
시내 안국동(安國洞) 근화녀학교(槿花女學校)에서는 시대 요구에 의하여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여자사진과(女子寫眞科)를 동교 안에 특설하고 지명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보통 학교 6학년 졸업 정도의 학생 50명을 모집하여 3개월 동안 가르친 뒤에 특히 연구과를 두어 보통과로 하여금 더욱 충실히 가르치기로 되어 한창 준비 중이라는데 오는 5월 10일까지 일반의 입학원서를 받고 이튿날인 11일부터 개학하리라는 바 이는 적어도 현재의 조선 여자들이 부르짓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함에는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필요한 이상 그 능력을 얻고자 함에는 무엇보다 실제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차츰 조선에서도 직업 부인들이 생기는 만큼, 직업 찾는 여성들도 많음으로 그에 응하여 무엇보다 여자에게는 합당한 사진술을 택하여 일반에게 주고자 그와 같이 설치하게 된 것이라더라. |
寫眞師協會講習 |
시내 경성사진사협회(京城寫眞師協會)에서는 신춘사업으로 견습생을 위하여 사진 강습원(講習院)을 설치하고 오는 이월말일부터 시내 관철동 조선사진관(朝鮮寫眞舘)에서 사진술을 가르친다는바 강사는 신락균(申樂均)리완근(李完根)씨 등 오씨라더라. |
1899년 무관 종2품이었던 부친 신택희 공의 차남으로 출생. 부친이 을사조약 체결로 관직을 그만두고 경기 안성으로 낙향. 인천공립상업학교에서 상업 실무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낙향, 결혼 후 서울로 자리를 옮겨 ‘경성관립공업학교 염직과’를 1918년에 졸업. 이 과정에서 사진화학 즉, 현상과 인화를 정밀하게 습득.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 안성에서 벌어진 3.29만세운동 사건에 가담해 수배 상태가 됨. 도피 도중 아마추어 사진가이던 매부 정욱진으로부터 사진술을 접함. 1922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정칙학교에서 1년간 영어 전공, 이후 동양대학교 문화학과에 재입학하여 2년간 문화사와 이론 공부. 1926년 동경사진전문학교 입학. 1927년 졸업 후 6년 만에 귀국. 그의 나이 28세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YMCA) 초빙 사진과 교수로 취임. 당시 YMCA는 영어과, 일어과, 목공과, 철공과, 기계과, 염직과, 사진과 등의 실무교육을 하고 있었음. 1926년 경성사진사협회 결성. 1934년 동아일보 입사. 1933년 신설한 동아일보 사진부(당시 사진과)에 1934년 입사. 초대 과장 최복순에 이어 2대 사진과장으로 취임.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주도로 일제에 체포. 사진기자 서영호에게 일장기 말소를 직접 지시하고, 사진 제판 과정에서 동판에 청산가리를 뿌려 일장기를 완전히 삭제하도록 함. 백운선, 서영호 등 사진부 후배 기자들과 함께 구속. 사진수정의 발안자로 알려진 운동부 기자 이길용, 화가 이상범, 사회부장 현진건, 기자 장용서, 잡지부장 최승만 등도 구속. 1937년 9월 동아일보 퇴사. 안성과 인천 등지에서 취직 및 사업. 1955년 수원북중학교 화학과 공민 교사로 근무 중 교정에서 뇌일혈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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